사진=이해덕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비즈월드] <섬으로 가는 길목 또는 입구>

그럼 왜 ‘힛도’일까?

힛도는 백도(白渡)다. 여기서 ‘도(渡)’는 배를 타는 ‘나루’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힛도는 흰나루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백야도로 가려면 힛도 선착장에서 배를 타야 했다. 또한 ‘도’는 좁은 해협(海峽)을 의미하며 ‘또’라고 했다. 따라서 힛도는 하얀 해협이라는 의미도 있다. 물살이 사나워 흰 포말을 일으켰으므로 그리 불렀으리라. 이밖에도 다른 말로는 ‘량(梁)’이 있다. 명량, 노량의 그것으로. 섬호 진경문이 쓴 ‘섬호집’을 보면 명량해전을 ‘명도전(鳴渡戰)’으로 표기했다.

한편 ‘또’는 제주방언으로 ‘입구’를 뜻한다. 서귀포 강정동에 엉또폭포라는 해독이 난해한 명소가 있다. 큰 비가 쏟아져야만 50 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수의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엉’은 ‘큰 웅덩이’로 엉또는 ‘큰 웅덩이 입구’라는 뜻이다. 나는 이곳을 2010년 여름에 찾아간 적이 있다. 추자도의 처사임을 자처하는 R선생과 함께 였다. 그동안 수십 차례 제주도를 드나들며 나름대로 어지간한 곳을 다 안다고 자신했던 내게 엉또폭포는 이런 방심에 허를 찌르는 경이로움이었다.

추자도에는 R선생과 같이 거처를 마련해 두고 있던 J선배가 있었다. 당시 그는 60의 나이에 마라톤 풀코스를 100회 이상 완주한 대단한 마니아였다. 한 때 증권전문가로서 모 경제주간지의 대표를 지낸 그였지만 웬일인지 마라톤에 빠져들면서 열혈적인 사회운동가로 변신했다. 함께 추자에서 제주로 나온 R선생은 예전 언론사 후배인 J선배와 약속했다며 서귀포의 한 콘도로 가자고 했다. 공항 앞에서 빨강색 경차를 렌트한 R선생과 나는 서귀포로 향했고. 그곳에서 J선배와 만났다.

J선배 또한 누님과 함께였는데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누님은 딸과 함께 여행중이었다. 생각지도 않게 J선배네와 콘도에서 함께 지낸 다음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걸 본 J선배 누님은 엉또폭포를 이야기했다. 엉또폭포라니? 공교롭게 누님네도 우리가 빌린 경차와 똑같은 것을 렌트했는데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앙증맞게 나란히 가는 모습은 마치 모종의 긴밀한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어설픈 비밀요원과도 같았다. 그렇게 네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가며 도착한 엉또폭포. 세상에나! 이런 장관이라니. 폭포는 무서운 기색도 없이 장엄하게 쏟아졌고. 우리는 전율했다.

그렇다면 힛도 또한 엉또와 마찬가지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추론은 제주도가 예전 전라도와 한 뿌리였다는 점에서 가능한 일이다. 바닷길에서 섬과 육지사이, 또는 섬과 섬 사이 빠른 물살이 지나는 해협을 도(또)라고 했다. 같은 의미로는 ‘목’을 들 수가 있는데 목포와 울돌목에서와 같이 길목이라는 뜻으로 입구를 가리킨다. 여수지역에는 ‘힛도’를 비롯해 ‘장군(도)도’와 남면의 ‘싱갱이도’가 있는데 모두 섬으로 가는 길목이다.

사진=이해덕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가막만과 여자만이 만나는 곳>

힛도에서 바라다보는 바다의 풍광은 한 폭의 그림이다.

동쪽으로 가막만과 함께 길게 늘어선 다섯 개의 섬들이 밀물과 썰물 때면 세 개의 섬으로 나뉘어졌다 하나로 이어지는 삼섬하며 꼬리를 닮은 오랑지라는 작은 섬이 있고, 서쪽으로는 내해(內海)로 길게 이어지는 낙조가 아름다운 공진이 반도가, 남으로는 백야도를 비롯해서 지리섬(제도), 꽃섬(화도), 모래섬(사도), 개섬(개도), 거무섬(금오도), 가마섬(부도), 닭섬(계도)이 저마다의 독특한 풍광을 바아낸다.

여수반도 끝자락. 가막만과 여자만이 만나는 곳에 백야도가 있다.. 백야도는 우리말 이름으로 흰 섬이라는 뜻이다. 섬의 주봉인 백호산 정상의 바위들이 흰 색을 띠어 섬이 하얗게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는 것이다. 또 흰 바위의 모습이 호랑이가 새끼를 품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백호산이 됐는데 이 때문에 한때 백호도라 불리기도 했다.

백호산은 일출과 일몰의 명소다. 백야대교와 백야등대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해돋이 명소로 꼽힌다 한편 백야도는 해넘이로도 유명한데 백호산에서 남해의 다도해로 지는 해를 조망할 수가 있다. 최근에는 설치미술가 최병수의 작품 한글 자모솟대가 백야도 해안에 설치돼 방문객의 눈길을 끌고 있는데 해질 무렵 자모솟대 너머로의 일몰은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수에서 백야도로 가려면 힛도에서 배를 타야 했다. 그러나 지난 2005년 백야대교로 연륙이 되면서 차로 드나들 수 있게 됐다.. 백야대교는 길이 325미터, 폭 12미터의 닐센 아치형 다리로 여수와 고흥을 연결하는 11개 다리 가운데 첫 번째 다리다.

백야대교에 이은 두, 세 번째 다리는 여수 돌산도와 화태도간, 여수 적금도와 고흥 영남간 다리이다. 2015년 개통된 돌산∼화태도간 화태대교(길이 460미터)는 서해대교와 같은 사장교이며 적금∼영남간 팔영대교(길이 1340미터)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와 같은 현수교로, 2016년 말 개통됐다. 또 여수 개도∼월호간 개도대교와 월호∼화태간 월호대교를 비롯해 나머지 구간도 당초 예상보다는 늦어졌지만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그 많던 호랑이는 어디로 갔을까?>

백야와 관련한 기사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보인다. 세종 16년 12월 22일 기사를 보면 ‘병조에서 계하기를 전라도 백야곶 목장의 호랑이와 표범을, 순천부사와 조양진 첨절제사 및 각 포의 만호로 하여금 군인을 요량하여 거느리고 잡되, 그 중에 먼저 창질을 하거나 쏘아서 잡은 자가 있거든 마리 수를 계산하여 벼슬을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이야기다.

엄동설한에 호랑이 사냥이라니. 한반도의 끄트머리인 백야곶에도 많은 호랑이가 살았다는 실록의 기사는 흥미롭다. 당시 백야곶목장은 지금의 여수시 화양면 일대로 화양반도 전체를 일컫는다. 간혹 이곳을 백야도로 착각해서 백호산 주변 목장이나 봉수대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영물(靈物)인 호랑이가 번성했다는 것은 산세의 기운이 범상치 않았음을 말해준다. 한반도의 끝자락이나 다름없는 이곳에 살았던 호랑이들은 아마도 이 땅의 수호신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많던 호랑이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뿐만이 아니다. 화양반도의 산천도 더 이상 의구(依舊)하지 않다. 광속(光速)으로 변화한다는 말이 이곳도 예외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터널을 뚫고 다리를 놓고. 도대체가 거침이 없다.

‘그 많던 호랑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백야대교를 건너 백호산 자락을 지날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계속되는 부질없는 의문. 그 누가 있어 이 땅에 살던 그들을 기억할까.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꿈같은 이야기에 또 누가 있어 귀를 기울일까.

고립에서 자유로워졌건만 백야도는 여전히 말이 없고. 여수바다를 끼고 잘 닦인 길 위로 나그네 또한 굽이굽이 무심한 듯 잘도 흘러갈 뿐. 이제 그만 안녕! 그 모든 침묵 너머로 왈칵 노을이 물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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