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해덕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비즈월드] <고흥 과역에서... 지나쳐버린 청춘을 묻다>

그 애가 말했다.

“형. 커피는 언제가 가장 맛있는 줄 알아?”
뜬금없는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비 오는 날?” 하고 말했다.
“우와! 대단한걸. 어떻게 알았어?”
“그냥. 왠지 그럴 거 같아서...”

서로가 공감하고 있음을 놀라워했는지. 그 애의 얼굴은 한결 밝아졌고. 칭찬같은 그 애의 말에 나는 왠지 쑥스러워졌다.
“맞아. 그런데 비 오는 밤에 마시는 커피가 가장 맛있어. 밤 10시 넘어 빗소리를 들으며 마시는 커피. 마치 오르가즘과도 같이 나를 강하게 자극하는 그 맛이란.”

오르가즘과도 같은 커피의 맛. 벌써 30년도 더 된, 오래된 그 애와의 시간이 새삼 생각나는 건. 강렬했던 언어만큼이나 직정적이던 추억 때문일까.

나는 지금 고흥으로 간다.
혹시 궁금한가? 왜 고흥이냐고.
그렇다면 말해주지.
커피 마시러 간다.
그냥 커피 마시러.
또 궁금하겠지. 커피 마시러 고흥에를 간다니.
눈치 채셨는가? 고흥에서 커피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그 애와의 시간은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라는 카페였어. 어때 근사하지 않은가? 그때는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와 같은 묘하게 감성을 자극하는 이름들이 제법 있었지. 음악다방의 기세가 잠시 주춤한 틈을 타 카페가 속속 생겨나면서 감성 마케팅으로 청춘들을 불러 모았던 거야.

그럼 이야기 좀 들어보겠어.

고흥으로 가며 문득 떠오른 것이 화가 나혜석의 고흥 행이었지. 임종을 앞둔 첫사랑 최승구를 문병하기 위해 찾아갔던 고흥은 부산서 뱃길로 꼬박 사흘이나 걸리던 외진 길이었다고 해. 그나마도 나혜석은 배의 고장으로 여수에서 하루를 지체하는 바람에 나흘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는 거야.

때는 1916년 봄. 나혜석은 일본 유학중에 도쿄에서 고흥군수였던 최승구의 형 최승칠의 간곡한 전보를 받고 서둘러 귀국선에 오른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고흥에 도착한 나혜석은 군수 관사에서 요양을 하던 최승구와 재회를 하고. 열흘 동안 지극정성으로 간병을 한 뒤 차도가 보이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

떠나는 연인에게 최승구는 말한다.

오해 없이 영원히 잊어주시오.

일본 도쿄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의 문예지(기관지)였던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인을 맡을 정도로 문재(文才)가 있었던 최승구는 최남선과 주요한을 잇는 신체시(新體詩)의 계보에서 주목받는 시인이기도 했다. 호는 소월(素月). 북에 김소월이 있다면 남에는 최소월이 있었던 것이다.

동경으로 돌아온 나혜석은 5일 뒤 한 통의 전보를 받는다. 최승구의 부고(訃告)였다. 나혜석은 오열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린 나혜석은 고흥으로 애도의 전보를 친다. 이 전보를 연인의 관(棺) 속에 넣어달라는 말과 함께. 그렇게 첫사랑을 잃은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나혜석에게 청혼(請婚)이 들어왔다. 상대는 김우영.

열 살 많은 딸 가진 홀아비였던 김우영은 집요했다. 그리고 나혜석은 이내 팔자소관이라 여기고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사실 첫사랑 최승구도 유부남이었던 것. 나혜석은 청혼을 승낙하기에 앞서 세 가지 약조를 받아낸다.

평생 자신만을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처소생 딸과는 따로 살 것.

뿐 만 아니었다.

김우영과 결혼한 나혜석은 신혼여행을 고흥으로 가자고 했다. 그것은 첫사랑 최승구의 무덤을 찾아가는 것으로. 그를 잊을 수 있도록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워달라고 했고. 김우영은 그 가당찮은 청마저 흔쾌히 받아들였다..

대략 이런 내용이야. 신혼의 신랑더러 첫사랑 연인의 무덤에 비석을 세워달라? 요즘처럼 분방(奔放)해진 세상에도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파격이 100년 전 그 때. 고흥에서 있었던 거야. 나혜석의 파격은 선각자니.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니 하는 수식어로 포장돼 회자되고 있기도 하지. 하지만 이는 나혜석이란 인물에 대한 호불호와 상관없이 요즘 말로 ‘독특한 캐릭터’가 과장된 측면도 없지 않지.

이런 생각이 들어. 어느 시대이건 간에 문제적 인간은 존재해 왔다는 사실. 그 시절이라고 예외일리는 없잖아. 그런데도 나혜석의 파격은 문제가 있어. 꼭 그래야만 했을까? 그건 오만이었어. 그 오만은 끝내 정조(情操)를 부정한 가당찮은 여인으로 낙인찍히는 수모를 견뎌야 하는 지경으로 내몰렸어. 한마디로 불륜녀였지.

그러나 세월이 약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나혜석은 엄청 주목을 받으며 미화되기 시작했어. 그녀의 고향인 수원에 가면 ‘나혜석 거리’라고 해서 그녀를 기념하는 거리공원이 조성돼 있기도 해. 자랑스런 수원의 인물이라는 거지. 심지어는 요즘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운동의 원조라고도 하네만. 그건 그렇고. 나혜석과 동시대를 산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봤다면 어떠했을까? 나혜석과 동갑인 김일엽은 제자로 받아들였지만 나혜석은 단호하게 거절한 만공선사라면 또 어떠했을까?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 세상사 같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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