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해덕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비즈월드] 호남에 ‘팔불여(八不如)’라는 말이 있다. 이는 흥선대원군이 팔도를 유람할 때 호남지방의 각 고을마다의 두드러진 특색을 함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에서 숱한 아류(亞流)가 생겨났다.

가령 ‘OO가서 ~자랑마라’와 같은 보다 구체적이고도 실감나는 지역 품평이 등장하게 된다. ‘팔불여’가 영광 광주 나주 순천 제주 남원 고흥 장성 등 일부 지역에 국한돼 있다면 ‘~자랑마라’는 보다 광범위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동일지역에 ‘돈, 얼굴, 노래, 주먹’과 같은 복수의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팔불여’는 ‘~은(는) OO만한 곳이 없다’는 것으로 예를 들어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 하면 ‘문장은 장성만한 곳이 없다’, 또 ‘전불여고흥(錢不如高興)’ 하면 ‘돈이 많은 곳은 고흥만한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품평은 다소 현학적이어서 그다지 대중성을 획득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오히려 ‘~자랑마라’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추세다.

‘~자랑마라’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 하나를 꼽으라면, 그것은 아마 ‘벌교 가서 주먹 자랑 하지마라’일 것이다. 대체 벌교 주먹이 얼마나 세기에 전국구 주먹으로까지 대접받던 광주나 목포를 무색하게 그런 말이 나왔을까?

시라소니, 김두한, 이화룡, 구마적, 신마적 등과 같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주먹들의 무용담에 대리만족을 느껴본 경험은 기성세대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또한 남자라면 사춘기시절, 소영웅주의에 사로잡혀 강한 주먹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가져봤음직도 하다.

그렇다면 ‘벌교 가서 주먹 자랑 하지마라’는 말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여기에는 이러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벌교에 소화다리라고 있다. 이야기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하루는 머슴인 안담살이가 소화다리로 나무를 팔러나갔다. 그런데 일본 헌병 하나가 말 위에 올라탄 채 ‘조센진’이라 멸시하며 한 사람을 채찍으로 때리고 있었다. 이를 본 안담살이는 분개했다. 하여 일본 헌병을 말에서 끌어내린 안담살이는 그를 무참하게 두들겨 팬 뒤 소화다리 아래로 떨어뜨려 죽이고 말았다. 그후 도주했던 안담살이도 결국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다 순천교도소에서 죽었다. 이것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벌교 주먹은 의로운 주먹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의병장 안담살이를 무용담의 주인공으로 하고는 있으나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소화다리를 무대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벌교역전에서 대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가면 소화다리다. 본래 이름이 부용교인 소화다리는 보물304호로 지정된 벌교 홍교와 함께 벌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구조물이다. 벌교(筏橋). 즉 뗏목다리는 조선 영조 때 놓았다는 홍교 이전의 다리였다.

여기서 이곳의 지명이 유래했다. 홍교와 나란히 벌교천에 놓인 소화다리는 1931년, 그러니까 소화(昭和) 6년에 축조됐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안담살이는 그 훨씬 이전을 살다간 인물이다. 그러니까 벌교 주먹의 기원으로 안담살이를 꼽는 것은 ‘의(義)’의 상징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럼 이름마저 특이한 안담살이는 누구인가? 그 인물의 행적을 추적해보기로 하자.

안담살이 의병장의 본명은 안규홍(安圭洪, 1879~1911)이다. 보성읍 우산리 택촌마을에서 태어나(득량면에서 태어났다고도 함) 문덕면 동산리에서 자랐으며 본관은 죽산. 담살이는 머슴을 가리키는 이 지방 말로 그대로가 별호가 됐으며 계홍이라고도 불렸다.

몰락한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난 안규홍은 일찍 부친을 여의고 머슴살이를 하면서 편모를 봉양했다. 그러다 안규홍은 벌교에서 조선인 부녀자를 희롱하던 일본 순사를 주먹으로 때려죽이고 의병이 된다. (이 이야기는 앞서 벌교의 안담살이와 매우 닮아 있다) 의병이 된 안규홍은 머슴들과 함께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전라도로 건너와 활동하던 함경도 출신 의병장 강성인의 휘하에 들어가 부장으로 활동한다. 스러나 강성인이 부녀자를 겁탈하고 양민의 재물을 빼앗는 등 악행을 일삼자 토착 의병들이 강성인을 처단하고 안규홍을 의병장으로 추대한다.

1908년 2월. 보성 문덕면 동소산에서 의병장으로 창의한 안규홍은 부장에 염재보, 참모장 송기휴, 선봉장 이관희 등을 앞세워 일본의 정예부대를 급습, 격멸시키는 등 큰 성과를 거둔다.

당시 의병들의 활약을 말해주듯 민간에서는 이런 노래가 유행했다.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같다 전해산/ 싸움 잘한다 김죽봉/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되나 못되나 박포대’

이 노래는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당한 뒤 호남지역에 창의한 의병장들의 면모를 보여주는 의병가이기도 하다.

노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안담살이는 일제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10년 9월. 안규홍은 부장 염재보 등과 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에서 일본군 토미이시(富石)부대에 의해 체포돼 1911년 5월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지며 32세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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