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해덕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비즈월드] 나주역을 출발한 기차는 노안역을 지나 경전선의 시발역인 광주 송정역에 멈춘다.

송정역.

내게는 송정리로 익숙한 곳이다. 살았던 기억은 전혀 없고. 그저 죽다 살아난 곳이라는 유년의 흑역사만이, 질긴 인연과도 같이 미몽처럼 남아있는 곳이 바로 송정리다. 들은 바대로라면, 상무대 보병학교 장교로 복무했던 선친을 따라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송정리로 내려왔다고 한다. 궁핍했던 시절. 초가집 마당에 솥을 걸고 밥을 짓던 어머니의 빛바랜 흑백사진에서 송정리의 생활을 잠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 사진은 도시 확장으로 고향집이 헐리면서 어디 창고에 처박혀 있는지 찾을 수도 없게 됐다.

그곳 송정리에서 돌도 되기 전. 기어 다닐 무렵이었단다. 갑자기 사색이 되어 자지러진 나를 속수무책으로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어느 범상치 않은 노인이 홀연 나타났다. 노인은 나의 기색을 살피더니 거침없이 손가락을 입안 깊숙이 넣어 무언가를 끄집어 냈다고 한다. 방바닥을 기어 다니며 닥치는 대로 입으로 집어 넣는 다는 걸. 잠시 방심했던 사이 그예 사달이 났던 것이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극적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민 노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어린 시절. 삐쩍 마른 나를 ‘돼지’라 놀리던 이유가 여기 송정리에서 비롯됐다는 걸 그 때는 몰랐었다. 어쨌건 나는 조금씩 철이 들면서 송정리를 다시 태어난 ‘제2의 고향’으로 여기게 됐다.

그 송정리를 다시 찾은 것은 대학 졸업반 때였는데 친구들과 여름방학을 맞아 남도를 여행할 때였다. 대구를 거쳐 광주에 도착한 날. 친구 N을 만나러 밤길을 물어 송정리로 갔다. 남달랐던 감회. 그런데 예기치 못한 광경에 나는 적이 당혹스러웠다. 그것은 길가의 논에 엄청나게 웃자란 연잎이었다. 웃자란 연잎은 마치 심청이의 인당수가 여기인 듯, 교교한 달빛 아래, 수마트라 섬에나 있을 법 한 공포의 식인식물마냥 왠지 모를 외경심마저 느껴지는 것이었다.

가로등 불빛마저 희미한 거리를 민가의 불빛에 의지한 채 밤길을 걸으니 여느 불빛과는 다른, 타락한 첫사랑의 유혹과도 같은 불야성이 있었다. 홍등가였다. 이미 이곳을 경험한 N은 천리 먼 길 찾아온 벗들을 위해 청춘의 통과의례와도 같은 그곳으로 우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N의 입장에서야 나름의 접대로 여겼는지 모르겠으나 전날 이미 대구 자갈마당을 답사한 청춘들은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오랫동안 궁금했던 송정리와의 재회는 하룻밤 풋사랑처럼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93년 전국체육대회 취재차 광주에 체류했을 때. 다시 찾은 송정리는 그야말로 환골탈태, 광주로 편입되면서 예전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완벽히 도시로 변신한 송정리는 변심한 연인과도 같이 몹시 낯설고 허전한 것이었다.

사진=이해덕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상념도 잠시.

송정리를 벗어난 기차는 단선(單線)으로 일편단심 흘러가는 서부경전선 구간을 향해 무슨 말 못할 비밀이라도 숨기듯 은밀하게 레일을 굴러간다. 그런데 왠지 높고 허전하다. 남광주역이 빠진 서광주역과 효천역 구간은 마치 은하철도999를 타고 공중을 유영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공허하다.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의 마지막 적응을 위한 배려인 듯, 이 구간을 벗어나면 화순 땅이다. 화순~능주~이양. 능주역에서 부전에서 오는 열차를 만난다. 11시 23분.

명봉역은 보성군 노동면에 위치한 산골 오지역이었다. 하지만 새롭게 길이 뚫리면서 고가도로가 역주변을 가로지른다. 최근 들어 ‘해바라기역’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명봉역은 ‘7080 코스프레 축제’로 향수 마케팅에 나선 득량역과 함께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노동면에는 또 하나의 기차역인 광곡역이 있었으나 지난 2011년 폐역이 됐다. 이 역을 지나면 보성역이다.

보성역은 서부경전선의 역 가운데 비교적 이용객이 많은 역으로 2014년부터는 부산발 남도해양관광열차(S-train)의 시종착역이기도 하다.

서부경전선이 광려선으로 운행되던 시절. 광주와 순천, 여수를 오가는 통근열차의 중간기착지로서의 보성역은 많은 추억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기차역이 없던 인근 장흥이나 강진에서도 이곳 보성역으로 와서 기차를 타고는 했다. 보성역에는 1922년 세워진 급수탑이 있다. 서부경전선의 열악한 선형(線形)을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은 승무원들의 승무교대나 급수 등을 위한 일종의 휴식공간이기도 했다.

보성, 득량을 지나니. 선로 때문인가. 기차가 적당히 요동을 치며 간다. 철커덕, 철커덕. 갑자기 느껴지는 기계음. 부질없다, 부질없다, 그렇게 나를 일깨우는 것만 같아. 고개를 돌려 차창밖을 바라보니 기차는 예당역에 멈춰선다. 시골역 치곤 제법 규모가 느껴진다. 나중에야 알게됐지만 철도청장의 고향이라는 프리미엄으로 근사한 역사를 갖게 됐다나 뭐라나. 이런 우화같은 이야기도 훗날에는 미담이 될까.

조성을 지날 때면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10년 전 숭례문 불타던 날. 동해 임원진에서 밤을 보내고 이별한 D다. 갑자기 인지력에 이상신호가 오는지. 비교적 총명했던 기억력이 예전만 못함을 느끼는 요즘. 거짓말처럼 D의 이름이 선뜻 잡히지가 않는다. 다행일까? 여하튼 파란 많은 인생길을 걸어왔던 D. 그 사람은 간절하게 내게 말했다. 제 말 좀 들어보시겠어요. 그 말은 조선시대 열녀문의 주인공과도 같았고. 잘 꾸민 비극과도 같은 것이어서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 한 많은 여인의 배설과도 같은 인생사를 나는 왜 들어야만 했을끼. 아니 왜 들어줘야만 했을까.

피천득의 ‘구원의 여상(女像)’에 꽂혀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는 그 사람 D의 고향이 바로 이곳 조성이다. 방앗간집 맏딸이었다던 D가 한 번은 벌교 사는 이모네를 갔다가 참꼬막을 가져온 적이 있다. 그 꼬막을 호프집 주방을 빌려 삶더니만, 숟가락으로 꼬막 껍질을 능숙하게 까던 D의 모습은, 영락없는 여자만(汝自灣) 갯벌에 기대고 사는 아낙의 모습이었는데...

나이 들어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이 도대체가 실감이 나질 않았고. 파릇한 청춘의 시절 또한 과연 내게도 있었는가, 이젠 기억조차 긴가민가할 때가 있다. 어떤 때는 철부지 아이와 같다가도. 우연히 거울 속의 낯선 내 모습을 보았을 때, 그 당혹스러움이란.

적어도 내 인생이 궤도를 충실히 따라 달리는 이 기차와 같았다면 어땠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고, 한결같이 사랑을 하고. 또 그렇게 일편단심 사랑을 하고...

이제 내릴 준비를 해야겠다. 내가 내릴 역은 벌교, 또는 순천, 그 어디가 될까.

한껏 무량(無量)해진 마음. 아, 이렇게 봄은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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