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해덕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비즈월드] <나주 동강 월송리 월해마을>

영남에 남명(南冥)이 있다면, 호남에는 섬호(剡湖)가 있었다.

남명이 누구던가. 경(敬)으로써 나를 밝히고, 의(義)로써 나를 던지겠다.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 이 여덟 글자를 칼에 새기고,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처사(處士). 칼을 찬 선비로 유명한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은 동년배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과 함께 영남 유림을 양분한 거목. 그러나 퇴계가 사대부의 길을 갔다면 남명은 처사의 길을 택했다. 거듭되는 사화(士禍). 벼슬은 덧없다. 대장부가 벼슬길에 나가서는 아무 하는 일이 없고, 초야에 있으면서도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 허형(許衡, 1279~1368, 원나라 학자)의 글이 가슴을 쳤다. 이로부터 남명은 처사의 길을 갔다.

그리고 섬호 진경문(陳景文, 1561~1642). 과문한 탓이겠지만 섬호는 남명에 비해 일반에게는 거의 생소한 이름이다. 그런 섬호를 감히 성현의 반열에 오른 남명에 비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됐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 페친으로 인연을 맺은 진용남님으로부터 ‘남도기행5’에 대해 뜻밖의 댓글이 올라왔다. 기사에 ‘곡강(曲江)’을 보고 고향인 나주 동강이 생각났고. 내친 김에 섬호 진경문 선생을 조명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나의 답글을 읽은 진용남님께서는 즉시로 ‘섬호집’ 목판본과 번역본을 택배로 보내주셨다. 서책을 대략 일별해 보니 생각보다 예사롭지가 않았다. 직감적으로 떠오른 것이 ‘호남의 처사(處士)’라는 수식어다. 동시대의 문장가들과 교유하며 곡강변에 섬호정을 짓고 안빈낙도하던 참 선비.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에 적극 나선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 나라에 공을 세웠으면서도 벼슬을 사양한 채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았던 섬호의 일생은 진정한 처사로서의 삶이 아니었던가. 처사 하나가 정승 열보다 낫다고 했다. 그만큼 고매한 선비의 길이라는 뜻이리라. 그러한 가문의 내력때문일까. 희성(稀姓)인 여양진씨(驪陽陳氏) 가문이 배출한 인물의 면면은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렇게 나에게 섬호를 일깨워준 진용남님께 거듭 감사드리며 섬호의 자취가 깃든 나주 동강 월송리를 찾아가기로 했다.

<곡강변 섬호정에 대한 단상>

자, 그럼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섬호정(剡湖亭)이 있는 나주시 동강면은 곡강면과 두동면(豆洞面)이 합치면서 가운데 한 글자씩을 취해 만들어진 지명이다. 자칫 ‘동강(東江)’이라 혼동하기 쉽지만 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곳에 연고를 가진 사람들은 ‘곡강’이라는 지명에 상대적으로 높은 친밀감을 갖고 있다. 영산강의 줄기가 이곳에 이르러 유려한 곡강을 이룬데서 그대로 지명이 된 곡강. 맞은편 무안 몽탄쪽으로는 ‘느러지’라는 물돌이동을 빚어냈으니. 어쩌면 곡강과 몽탄은 일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이곳 나주 동강 월송리에 섬호정이 있다. 월송리는 월해(月海)와 송암(松岩)마을을 합쳐서 된 이름이다. 섬호정은 여기 월해마을에 있었다. 그런데 왜 섬호정일까. 땅이름 섬, 또는 강이름 섬. 다른 음으로는 날카로운 염으로 읽히는 불과 칼을 뜻하는 이 글자. 사람들은 나주와 함평의 경계에서 양양해진 강을 사호강(沙湖江)이라 불렀다. 강을 호수로 본 것이다. 또 사호강변 함평 학교쪽으로는 사포(沙浦)나루가 있다. 섬호강은 사호강의 별칭이었을 것이다. 월송리와 이웃한 대지리에는 곡호정(曲湖亭)이 있었다. ‘곡호’ 또한 ‘곡강’을 부르는 것이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수십 개의 지천이 모여 강을 이룬 영산강은 곡강인 이곳에서 마지막 용틀임을 하고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추측이지만 ‘섬호’는 ‘표해록’을 남긴 금남 최부(錦南 崔溥, 1454~1504)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금남은 월송리와 이웃한 인동리 성지마을이 고향이다. 표해록 제2권에는 ‘섬계(剡溪)’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섬(剡)’은 본래 중국 절강(浙江)성 회계(會稽)현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풍광이 빼어나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금남이 표류해 도착한 곳이 절강성 영파(寧波)였다. 그곳의 산수에 반한 금남이 돌아와 고향의 강에 ‘섬호’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닐까. 우리의 땅이름 가운데 상당수가 대륙으로 일컫던 중국의 지명과 같음을 비춰봐도 이는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임란 참전기록 ‘예교진병일록’>

그렇다면 처사로서의 섬호의 삶은 어떠했을까. 섬호는 앞서 언급한 남명보다 정확히 60갑자의 차이를 두고 명종 16년(1561)인 신유년에 태어났다. 남명이 외가인 경남 합천 삼가에서 태어날 무렵. 한 풍수가가 집터를 보고는. 이곳에서 태어날 아이는 장차 성현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확인할 길은 없으나 섬호 또한 상서로운 태몽을 갖고 세상에 나왔을 것이다.

남명이 칼을 찬 선비였다면. 섬호는 칼을 들고 전장에 나간 행동하는 선비였다.

섬호는 정유재란 당시 순천 예교성 전투에 참전하며 기록을 남겼다. 예교진병일록(曳橋進兵日錄)‘이다. 이와 함께 다수의 임란 기록을 남겼는데 섬호는 승전과 패전을 가감없이 기술했다. 특히 ’명도전(鳴渡戰)‘으로 기록된 명량해전 기사를 보면 ’군사들이 힘을 다해 적장 ‘마태두(馬太斗)’를 베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마태두‘는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나오는 ’마다시(마다시(馬多時)‘와 동일인물로 보인다. 그동안 ’마다시‘가 과연 누구였나를 두고 이론이 분분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어란여인‘에 등장하는 간 마사가케(菅正陰)라고 본다. (그동안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라는 설이 유력했었다) 거듭 말하지만 ’마다시‘, 또는 ’마태두‘는 간 마사가케의 온전한 이름 간 마타시로마사가케(菅又四郞正陰)의 ’마타시로(又四郞)‘를 우리말로 음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임란 참전기록인 ‘예교진병일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정유년 가을 적이 호남을 대거 침략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물러나 순천부의 남쪽인 예교에 웅거했다.’

예교는 순천 왜성을 가리킨다. 삼면이 바다로, 육지부로는 해자(垓子)를 파 바닷물을 끌어들여 예교를 이용해 출입이 가능힌 이곳을 그렇게 불렀다. 나는 2년 전 여름. 이곳을 찾아갔었다. 지금이야 산책로로 잘 정비되어 정상까지 그리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가 있지만 정유재란 당시 섬호의 눈에는 험준한 요새로 비쳤는가 보다. 산의 형세가 우뚝 솟아 장대하기가 호랑이가 엎드린 듯 하다 했으니.

‘예교진병일록’은 정유재란의 귀중한 사료(史料)로 의미가 있다. ‘난중일기’와 마찬가지로 생생한 참전 기록이다. 1589년 생원시에 합격한 섬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향을 떠나 피란 중에 격문(檄文)을 8도에 보내 왜군에 맞서 반격할 것을 주장했다. 강화도에 도착해서는 의병을 모집하였고. 그곳에 주둔해 있던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에게 군량 3백 석을 전달했다. 그 후 섬호는 강화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유재란으로 호남으로 이동한 섬호는 의병장인 소의장(昭義將) 임환(林懽, 1561~1608)의 참모장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예교성으로 진군한다. 우의정 이덕형(李德馨)과 도원수 권율(權慄)의 휘하에 배속된 섬호는 명나라 유정(劉綎)의 부대와 예교성 전투에 참전했다. 이 때의 참전 과정과 결과를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겼으니. 이것이 바로 ‘예교진병일록’이다.

<‘격외(格外)’의 삶과 교유관계>

‘섬호집’을 보면 섬호의 교유관계를 대략 짐작할 수가 있다. 섬호는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1593)의 문인인 석주 권필(石州 權韠, 1569~1612)과 관해 임회(觀海 林檜, 1562~1624)와 가깝게 지냈다. 당대의 문장가인 석주와는 여덟살의 나이 차이에도 아랑곳 없이 우정을 나눴다. 섬호는 낚싯대를 보내며 시를 남겼고. 절의를 꺾지 않고 세상의 부귀영화에 흔들리지 않겠노라 약속했다. 관해는 송강의 사위로 그가 광주목사 시절 만난 송강의 아들 기암 정홍명(畸庵 鄭弘溟, 1582~1650)은 ‘섬호집’의 발문(跋文)을 썼다.

특히 섬호의 교유관계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와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 1537~1582)의 자제들과의 교유다. 조선의 풍류남아로 문장가였던 백호는 나주 다시면 회진리가 고향이다. 섬호의 집과는 지척간이다. 백호의 둘째 아들인 임준(林埈)과는 조정의 소식으로부터 동떨어진 처지를 읊은 시를 주고 받았고. 셋째 아들인 임탄(林坦)과는 화순 능주 지석강변 영벽정(映碧亭)에서 김인후(金麟厚)의 학덕을 기억하며 주변 풍경을 노래했다.

동년배인 임환과는 각별했다. 임란이 발발하자 강화도로 간 것도 김천일 휘하의 소의장이었던 임환 때문이었다. 임환의 참모장으로 활약한 것으로 볼 때 섬호는 지략가였다. 조직의 리더이기 보다는 참모로서 리더의 두뇌 역할을 하는 것. 섬호는 임환을 마음으로 존경했다. 임환이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을 못내 가슴 아파할 정도였다. 이는 참모의 제일 덕목이다. 이 하나만으로도 처사로서의 섬호라는 인물의 진면목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남명 또한 리더였다기 보다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그 아래서 홍의장군 곽재우와 같은 인물이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관찰자로서 예교성 전투를 그가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참모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결과물이다. 더욱이 섬호는 임환의 양자로 들어간 백호의 넷째 아들 임계와도 교유했다. 이와 같이 처사로서 ‘격외(格外)’의 교유관계에서 섬호의 인간미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섬호는 최경창,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는 옥봉의 아들인 송호 백진남(松湖 白振南, 1564~1618)과도 각별했다. 해남 송정리에 송호정을 짓고 유유자적하던 송호는 문장과 글씨에 모두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극찬했을 정도다. 주지번이 누구던가. 전주 객사에 걸린 ‘풍패지관(豊沛之觀)’이란 현판 글씨를 남긴 인물. 송호는 제술관(製述官)이 돼서 사신으로 온 주지번을 맞았다. 제술관은 사신을 수행하며 접대하던 벼슬로 학식과 문장에 뛰어난 사람을 천거해 맡겼다. 송호의 부친인 옥봉도 제술관을 지냈다. 섬호는 송호가 병중에 있을 때 이를 안타깝게 여기며 시로써 편지를 썼다. 가련타 그대 파리하게 병석에 누웠으니/ 금리마을 앵두꽃도 이별을 원망한다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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