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해덕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비즈월드] <나주 율정에서 영산포 선창까지>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이란 것을. 유난히 우애가 깊었던 형제. 형제는 나주 율정(栗亭)에서 기약없는 작별의 인사를 나눈 채. 유배지로 각자의 길을 떠나갔다.

자, 그럼 이제부터 이야기 한 번 들어보시겠는가?

<율정에서 이별한 형제>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경기 양주 땅 마현(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라는 곳에서 태어난 형제. 이들은 4형제 가운데 둘째와 셋째로 네 살 터울이었다. 형제는 율정에서의 이별이 있기까지 참 많은 날들을 함께 했다. 형은 동생의 울타리였다. 그러나 형만한 아우가 없다고는 해도. 동생 또한 예사롭지가 않았다. 부친이 화순현감이 되었을 때. 형제는 그곳 동림사에 머무르며 비로소 학문하는 즐거움을 알았다.

‘우리 아름다운 아가위꽃/ 안팎으로 서로 비추며 너그럽게 대하고 이끌어 주니/ 가슴속에 정성이 일어나누나’

동생은 시를 지었다. 아가위꽃(상체·常棣). 시경(詩經)에 나오는 꽃. 꽃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우애있는 형제를 비유하는 꽃. 동생은 자신과 형을 아가위꽃에 빗대어 시를 썼던 것이다.

벼슬은 동생이 먼저였다. 형은 벼슬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며 사류(士類)와 교유하며 지냈다. 동생은 형을 설득했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임금을 섬길 길이 없습니다.

임금인 정조는 말했다. 형의 준걸한 풍채가 동생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 그리고 이들 형제를 신임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죽은 큰 형수의 기일(忌日)이었다. 형제들은 마현 고향집으로 모였다. 거기에는 맏형의 처남되는 사돈도 와 있었다. 제사가 끝나고 이들은 서울로 가기 위해 한강에서 배를 탔다. 배가 두미협(斗尾峽,팔당대교 근처. 양수리부터 서울 광장동에 이르는 한강을 두미강, 또는 도미강으로 불렀음)에 이르렀을 때. 사돈이 천주교를 말했다. 배가 서울에 닿자 형제는 수표교에 있는 사돈의 집으로 따라갔다. 사돈에게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克)’과 같은 천주교 교리서를 빌려 읽은 형제는 신앙에 눈을 뜬다. 그리고 이 일은 형제에게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임금의 총애를 받던 두 형제를 시기한 중신들은 이를 빌미로 집요하게 공격했다. 다행히 왕의 신임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정조가 승하하고 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수렴청정에 나선 정순왕후는 신유박해를 일으켰고. 형제도 꼼짝없이 걸려들었다. 배교(背敎)로 간신히 죽음을 모면한 형제에게는 각각 신지도와 장기현으로의 유배형이 내려졌다. 그러나 신유박해의 억울함을 알리려는 백서(帛書)사건이 터지면서 유배지는 다시 흑산도와 강진으로 바뀌었다.

이쯤 되면 진즉에 눈치를 채셨을 것이다.

형제는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쓴 손암 정약전(巽庵 丁若銓, 1758~1816)과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사돈은 이벽(李檗), 백서를 쓴 사람은 형제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黃嗣永)이다.

‘미움이 이는 까닭은 율정점 문 앞길이 두 갈래로 난 것이네/ 본시 한 뿌리에서 태어났는데 낙화처럼 뿔뿔이 흩날리다니/ 천지를 넓게 볼 양이면 모두가 한 집안이건만/ 좀스레 내 꼴 내 몸만 살피자니 슬픈 생각 언제나 끝이 없지’

나주 대호동 동신대 인근에 율정(栗亭) 3거리가 있다. ‘밤남정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삼남길의 하나인 호남대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로 ‘삼도(三道)’라 했다. 1도는 장성에서 광주 송정을 거쳐 나주로 들어오는 길이요. 2도는 나주에서 함평, 무안을 거쳐 목포로 가는 길. 그리고 3도는 나주에서 영암, 강진, 해남으로 가는 길이었다.

동신대 정문에서 노안(老安)방면으로 약 5백 미터 가량 가다 보면 오른편에 칠전(漆田) 저수지가 있고. 그 끝자락에 3거리가 나오는데 이 곳이 바로 율정이다. 이 길은 조선시대 나주에서 한양으로 오가는 주요한 길목이어서 길 떠난 나그네들이 이용하는 주막이 있었다.

율정에서 형제는 작별을 했다. 밤새 주막에서 이별을 아쉬워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형제. 형제는 나루의 이별보다는 길 위의 이별을 택했다. 그리고 손암은 영산강 줄기따라 흑산도로, 다산은 영산강 건너 강진으로 떠나갔다. 순조 1년(1801) 11월 22일이었다.

<우이도 출신 홍어장수 문순득>

손암과 다산, 두 형제가 유배를 떠나던 그 해. 국적불명의 외국인 5명이 탄 배 한 척이 제주도로 표류해왔다. 이들은 ‘막가외(莫可外)’라고 말하며 동남쪽을 가리켰다. 보고를 접한 조정에서는 이들을 청나라 상인일 거라 짐작하고 성경(盛京,지금의 중국 심양)으로 보냈다. 이에 청나라는 아니라며 다시 돌려보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막가외’는 어디란 말인가? 그렇게 8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과 말이 통하는 조선인이 나타났다. 문순득(文順得, 1777~1847)이었다.

‘여송국의 표류인(漂流人)을 성경(盛京)에 이자(移咨)하여 본국으로 송환시키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신유년 가을 이국인(異國人) 5명이 표류하여 제주에 도착하였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오랑캐들의 말이어서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나라 이름을 쓰게 하였더니 단지 막가외(莫可外)라고만 하여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자관(移咨官)을 딸려서 성경(盛京)으로 들여보냈었는데, 임술년 여름 성경의 예부(禮部)로부터도 또한 어느 나라인지 확실히 지적할 수 없다는 내용의 회자(回咨)와 함께 다시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그중 1명은 도중에서 병이 들어 죽었다. 그리하여 우선 해목(該牧)에 머루르게 한 다음 공해(公廨)를 지급하고 양찬(粮饌)을 계속 대어주면서 풍토를 익히고 언어를 통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가운데 1명이 또 죽어서 단지 3명만이 남아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나주(羅州) 흑산도 사람 문순득이 표류되어 여송국에 들어갔었는데, 그 나라 사람의 형모(形貌)와 의관(衣冠)을 보고 그들의 방언(方言)을 또한 기록하여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그런데 표류되어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용모와 복장이 대략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여송국의 방언으로 문답(問答)하니 절절이 딱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미친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서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는 정상이 매우 딱하고 측은하였다. 그들이 표류되어 온 지 9년 만에야 비로소 여송국 사람임을 알게 되었는데, 이른바 막가외라는 것 또한 그 나라의 관음(官音)이었다. 전라 감사 이면응(李冕膺)과 제주 목사 이현택(李顯宅)이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으므로 이 명(命)이 있게 된 것이다.-’조선왕조실록‘ 순조 9년(1809) 6월 26일-

우이도 출신 문순득은 흑산도와 나주를 오가며 장사를 하던 홍어장수였다. 홍어장수 문순득. 여기서 우리는 이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01년 12월. 문순득은 홍어를 사러 흑산도에 가다 풍랑을 만나 표류를 하게 된다. 그렇게 바다를 표류해 도착한 곳은 유구국(流球國, 오키나와). 다행히 조선에 우호적이었던 유구국에서 3개월을 머무른 문순득은 귀향을 위해 배를 탔지만, 또 다시 표류. 더 남쪽인 여송국(呂宋國, 필리핀)으로 떠내려간다. 여송국에서 9개월을 보낸 문순득 일행은 청나라 상선을 얻어타고 마카오에 도착한 뒤 난징과 베이징을 거쳐 조선으로 귀국, 1805년 1월 고향인 우이도로 돌아온다.

<문순득, 손암을 만나다>

우이도는 조선 수군이 주둔하던 흑산진의 관할이었다. 일제시대 가거도를 소흑산도라 했지만 본래 우이도를 소흑산도라 불렀다. 흑산도로 귀양을 간 손암은 흑산도와 우이도를 오가며 살았다. 문순득이 우이도로 돌아왔을 때. 손암도 그곳에 있었다.

여기에서 이런 가정을 해본다. 손암이 영산포에서 흑산도로 가는 배를 얻어 탄 것이 우연히도 문순득의 홍엇배였다면?

흑산도까지의 3백리 뱃길은 꼬박 일주일이 걸리는 먼 길이었다. 가는동안 문순득은 여간한 파도에는 전혀 흔들림 없이 태연한 손암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단박에 알아챘다. 고매한 인품. 문순득은 그를 흠모했고. 마음속에 깊이 담아두었다. 그런데 우이도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돌아온 문순득은 손암을 찾아가 이국(異國)을 떠돌며 보고 겪은 일들을 들려줬다. 문순득의 이야기를 들은 손암은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썼다. 이를 근거로 다산은 ‘경세유표(經世遺表)’를, 그리고 유배지 강진의 제자였던 이강회(李綱會, 1789~?)는 선박 논문인 ‘운곡선설(雲谷船說)을 썼다.

문순득의 행적을 가상히 여겼던 손암은 그에게 ‘천초(天初)’라는 호를 지어줬다. 그가 경험한 일들이 일찍이 없었던 미증유(未曾有)라는 뜻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손암은 유배지 우이도에서 1816년 굴곡 많은 삶을 마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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