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해덕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비즈월드] 1979년. 대마초 파동의 족쇄는 풀렸지만 김정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으로 병신이 되었다더라.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이러한 김정호의 부재는 병역 때문이었다. 방위병으로 소집이 된 김정호는 이를 깜빡했다. 친구따라 지방공연을 가는 바람에 입영날짜를 놓치고 만 것. 우여곡절이었다. 병역을 마치자 이번엔 건강에 이상신호가 왔다. 지독한 감기로 병원에 갔더니 폐결핵이라고 했다. 폐결핵이라니. 갈 길은 아직 먼 데 마음만 조급해졌다. 1980년 재기를 노리고 내놓은 앨범 ‘인생’의 반응도 신통치가 않았고. 설상가상 병은 깊어만 갔다. 의사의 권유로 인천 요양병원에 입원한 김정호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넉 달 만에 뛰쳐나온다. 그리고 1983년 유작(遺作)이 되고 만 ‘님’을 발표한다.

“내 죽거든 앞이 보이는 널찍한 곳에 묻어 달라.”

1985년 11월 29일. 김정호는 서른 셋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마침내 영원한 자유를 얻는다. 요절(夭折)이었다.

그리고 2012년 2월. 담양에 김정호 노래비 건립을 위한 추진위원회가 발족됐다. 담양출신으로 ‘바위섬’을 부른 후배가수 김원중의 발의에 의한 것이었다. 노래비 제막식은 2015년 10월 8일에 있었다. 김정호 사후 30년인 2015년 9월에 광주에서는 그가 다녔던 수창초교에서 ‘제1회 김정호 가요제’도 열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광주시는 그가 태어난 북동 생가터에서 수창초교에 이르는 1.3㎞의 길을 ‘김정호 특화 거리’로 조성키로 했다.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가로수길로 첫 손가락에 꼽히는 곳이다.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입장료도 받는다. 이쯤 되면 메타세쿼이아가 담양을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이 길의 내력을 살펴보자.

1972년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는 내무부에 가로수 정비사업을 지시한다. 산림녹화와 사방사업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 때 정부가 가로수 시범사업 지역으로 선정한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담양과 순창을 잇는 국도 24호선 8㎞구간이었다. 그리고 이 구간에 심을 나무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한 공무원이 권장 가로수로 정해진 수종 가운데 이름도 생소한 ‘메타세쿼이아’를 택하였기 때문이었다.

나무를 납품한 사람은 담양천변에서 조경수 농원을 운영하던 김재호였다. 그가 키운 묘목은 1965년 창경원(창경궁)에서 꺾어다 기른 것이었다. 이렇게 심은 메타세쿼이아는 속성수답게 1년에 1m씩 쑥쑥 잘도 자랐다. 이 길을 비롯해 담양에는 4400그루의 메타세콰이어가 있다. 후일담이지만 당시 메타세쿼이아를 심자고 건의했던 공무원은 농민들의 반발로 물러났다고 한다. 너무 큰 나무 때문에 그늘이 생겨 농사에 지장 있다는 농민들의 불평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2000년 국도 확장공사 때 지역 시민단체들은 메타세쿼이아 178그루를 베라고 주장했다. 이에 일부 뜻있는 이들이 나섰고. 64그루만 베고 나머지는 간신히 살아남았다.

45년전 심은 메타세쿼이아가 담양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가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산림녹화’의 중요성을 간파한 박정희의 안목이 단단히 한몫을 했다는 점이다.

차량통행이 금지된 메타세쿼이아 길에는 모두 487그루의 나무가 있다. 길은 직선과 원근법의 미학(美學)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진을 찍으면 그대로가 작품이다. 이 아름다운 길에서. 열다섯 나이에 들었던, 그를 만나 오래 묵은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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