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해덕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비즈월드] 전날 장거리 여행의 여독이 미처 풀리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해남 아우로부터 장흥으로 된장 물회를 먹으러 가자는 연락이 왔다.

“12시 까지 오니라.”

“알겄으요.”

사진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해남 아우는 국내의 어지간히 풍경 좋은 곳은 두루 답사를 다녀 나름 동행의 즐거움이 있는 친구다. 나와는 15년 지기로 가끔씩 남도를 드라이브 삼아 구석구석 누비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지난 봄 내가 된장 물회 얘기를 꺼냈더니, ‘여름이 돼야 할 걸요’ 하던 아우는 잊지 않고 연락을 해 온 터였다.

“뭔 노무 날씨가 이렇게 덥다냐.”

“여름이라 그렇지 모.”

푹푹 찌는 염천의 불볕 더위에 대한 긍정적이면서도 다분히 싸가지 없는 대답임에도 운전을 해야 하는 아우를 생각해 평소 나답지 않은 인내와 아량으로 ‘그런가’하고 웃어 넘겼으니. 오호라, 된장 물회여!

된장 물회의 본향 격인 장흥 회진(會鎭)을 가려면 읍내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용산과 천관산이 아름다운 관산을 차례로 지나야 한다. 그리고 다다른 회진은 장흥의 동남쪽 끝머리 바다에 면한 유서 깊은 고장이다.

조선시대 회령포(會寧浦)인 이곳은 정유재란 당시 명량해전을 앞두고 충무공이 전라우수사 김억추 등 부하 장수들과 비장한 결의를 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른바 ‘회령포 결의’다.

회진면소재지로 들어서면 복원된 회령진성이 우뚝하다. 바로 회령포 결의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충무공은 배설에게 배 12척을 넘겨받아 조선 수군 재건의 교두보를 마련한다.

또한 소설가 이청준의 고향이기도 한 회진에는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 세트장이 회진리 초입 길가에 있다. 면소재지에서 곧장 길을 잡아 내려가면 갯벌이 드러난 곳에 삭금 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낙조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매스컴에도 소개된 ‘삭금횟집’은 웬일인지 손님 하나 없이 조용하다. 다시 길을 잡으니 오른쪽으로 이청준의 생가가 있는 진목 마을 가는 길이 보인다. 마을 한가운데 정자에는 촌로들이 여름 한낮의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정자 옆으로 난 경사진 고샅길을 따라 오르니 ‘문학산책로’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회진면 신상리는 소설가 한승원의 고향이기도하다. 한승원은 장흥 안양면 율산 마을에 ‘해산 토굴’이라는 집필실을 마련하고 만년을 보내고 있다.

이리저리 찾아 도느라 점심때를 한참 놓치고 나서야 회진 새마을금고 옆 골목길에 있는 ‘우리횟집’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방문턱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쬐고 있던 노인장이 주춤주춤 일어서며 인사를 한다. 무료하게 손님을 기다렸었나 보다. 물회 2인분을 주문하자 곧바로 주방 쪽으로 발걸음을 하는 노인장. 구부정한 허리에 걸음걸이도 불편해 보인다. 이런 어르신께 음식을 청하다니. 공연히 송구스런 생각이 든다.

벽에 걸린 메뉴판을 보니 ‘물회(원조)’라 적혀 있다.

된장 물회는 뱃사람이 바다로 나갈 때 싸들고 간 김치가 시면 갓 잡은 생선을 회를 떠서 물에 된장을 풀어 함께 먹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한다. 대략 6,70년 전 부터라고 한다. 된장은 생선의 비린내를 잡고 속을 편하게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이 물회를 식당에서 팔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 회진 포구에서 ‘목포집’이라는 옥호를 내걸고 영업을 하던 선술집이었다. 그 후 90년대 들어 물회를 취급하는 횟집들이 생겨났으니.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우리횟집은 말하자면 된장 물회의 중시조격인 셈이다.

잠시 후 동그란 알루미늄쟁반에 조촐한 반찬과 함께 물회가 나왔다. 어종을 물어보니 우럭이란다. 각자의 양이 따로 담겨 나올 줄 알았더니 커다란 양푼에 국자와 함께 나온다. 알아서 양만큼 떠서 먹으라는 것일 게다.

시큼하면서도 매실의 단 맛이 약하게 느껴지는 물회는 아삭한 식감의 열무김치가 포인트다. 잘게 들어가 있는 우럭은 오히려 뒷전에 가깝다. 노인장이 선친을 따라다니며 배웠다는 물회가 아마 이 맛에 가까웠으리라. 인공감미료에 익숙한 세대들에게는 다소 낯선 맛일 수도 있겠으나 나름 ‘개미’가 느껴진다. 하기야 오후 3시 넘어 먹은 점심이니 ‘시장이 반찬’도 한 몫 했을 터.

조미료에 극히 민감한 해남 아우도 맛있게 비워낸다. 맛에 인색한 아우가 군말이 없는 걸로 보아 충분한 별점을 줘도 무난할 듯 싶다. 그러나 맛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는 것이 맞다. 그것이 밥상을 차려준 어르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는지.

회진을 빠져나오려는데 시외버스터미널이 인상적이다. 혹시라도 젊은 날의 이청준이 진목 마을에서 어머니와 함께 ‘눈길’을 걸어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대처로 나갔을 지도 모를, 그 오래된 풍경과 떠나는 자의 비감(悲感)이 한데 섞여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아야. 커피 한 잔 할까나?”

“...”

“...”

“회진은 겨울이 더 좋아요. 봐서 그 때 다시 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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