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해덕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비즈월드] 2014년 봄부터 여름까지. 나는 서울 풍납동에 있는 A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2년 전 같은 병원에 입원한 후로 또 다시 불운이 찾아든 것이었다. 절망적이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그런데 이상했다. 절망으로 통곡해도 시원찮을 상황인데도 오히려 헛헛한 웃음만 나왔다. 미쳤구나. 그 때 나는 미쳐버린 줄로 만 알았다.

하지만 모진 것이 사람 목숨이라더니. 숱한 갈등과 고비를 넘기고 엄혹한 현실을 인정했을 때. 마치 세상을 구한 사람처럼 나에게도 평안이 찾아왔다.

그 때. 답답한 병실을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어 휠체어를 타고 즐겨 찾던 곳이 병동과 병동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그곳에서 나는 스마트폰으로 두 곡의 노래를 계속해서 듣고 또 들었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로 시작되는 '낙화유수(落花流水)'는 당시의 나를 온통 흔들었다. 남인수가 부른 이 노래를 들으며 떨어진 꽃과 같은 내 신세를 달래고 또 달랬다. 노래는 마지막 3절에서 절창을 이룬다.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보내고 가는 것이 풍속이더냐.'

한 때는 나 역시도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던 포구와 같은 존재였었지. 그런데 인정은 떠나가고. 어느새 '이름 없는 항구'의 낯선 이방인이 되었으니...

그리고 또 나를 흔든 노래. '부용산'이다.

한 시절 빨치산의 노래로 잘못 알려져 불운을 겪어야 했던 곡이다. 그럴 만도 했다. 노래의 배경은 전남 보성 벌교. 이곳에 부용산(193m)이 있다. 초암산이 동쪽으로 뻗어 내려 이곳 벌교에 와서 부용꽃 형상으로 맺은 산. 노랫말은 박기동이 썼다. 박기동은 1917년 여수 돌산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고 1943년 돌아와 벌교남초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해방을 맞는다. 박기동에게는 여섯 살 아래 여동생이 있었다.

동생은 18세에 시집을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폐결핵에 걸려 순천도립병원에 입원을 한다. 동기간에 우애가 남달랐던 박기동은 누이의 병실을 자주 찾는다. 그러나 이런 오빠의 보살핌도 아랑곳없이 동생은 24세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동생을 부용산 자락에 묻은 박기동은 오리 솔밭 길을 걸어 내려오며 부용산이라는 시를 짓는다. 사무치는 제망매가(祭亡妹歌)였다.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고 다음 해인 1948년. 박기동은 벌교를 떠나 목포 항도여중(목포여고의 전신)으로 전근을 간다. 여기서 박기동은 운명처럼 음악교사로 있던 안성현을 만난다. 둘은 처지가 비슷했다. 안성현에게도 어린 누이가 있었다. 그 안성현의 누이는 1947년 박기동의 누이가 세상을 떠나던 해 15세의 나이로 광주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항도여중에는 김정희라는 3학년 학생이 있었다. 서울에서 경성사범학교에 다니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 목포로 내려와 항도여중에 들어온 것이었다. 어여쁜 외모에다 성적도 우수해 촉망 받던 김정희는 그러나 1948년 가을, 16세의 나이로 요절을 하고 만다.

그 즈음. 안성현은 박기동의 시 부용산을 만난다. 동병상련에서 일까. 부용산을 본 안성현은 단숨에 곡을 써내려 간다. 비가(悲歌)였다.

안성현(安聖鉉, 1920~2006).

대중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를 작곡한 사람이라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덧붙이자면 그의 숙부는 일제시대 필명을 날리던 문학평론가 안막(安漠, 1910~?)이고. 그보다 더 유명했던 무용가 최승희(崔承喜, 1911~?)가 안막의 부인이었으니. 사뭇 범상치 않은 가계임엔 틀림없다.(일설에는 안막과 안성현이 숙질간이 아니라고도 봄)

그러나 6.25 전쟁 통에 안성현은 안막과 최승희와 마찬가지로 월북을 하면서 오랫동안 금기시 된다. 물론 그가 작곡한 노래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목포에서 시작된 부용산은 애절한 노랫말로, 여순반란사건으로 입산한 빨치산의 애창곡이 되면서 불온가요로 낙인을 찍힌다.

다시 세월이 흘러 1997년. 부용산은 가수 안치환에 의해 다시 불리며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부용산은 작자미상의 구전가요였다. 민주화 운동권 내에서 은밀하게 불리며 전해졌던 까닭이다.

여하튼 나는 부용산을 부르며 자연스럽게 안성현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가 나주 출신이라는 것도.

나주시는 그를 기려 지난 2009년 5월 남평(南平) 드들강(지석천)변 솔밭 공원에 노래비를 세웠다. 노래비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지난해 8월에는 노래비 주변에 음악센서가 장착된 새집 형태의 스피커 3대를 설치해 사람이 5~8m 이내로 근접하면 노래가 흘러나오도록 했다.

센서에는 안성현이 6.25 이전에 작곡한 엄마야 누나야와 '앞날의 꿈' '진달래' '내 고향' '어부의 노래' '들국화' '낙엽' '봄바람' '비' 그리고 부용산 등 10곡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담겨 있다.

솔밭을 찾아가기에 앞서 나주 금성관 주변에 있는 식당엘 들렀다. 그 유명한 나주 곰탕을 먹기 위해서다. H집, N집 등이 유명한데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리지만 나는 주로 N집을 이용한다. 맛도 맛이지만 열린 주방에서 음식을 차려 내는 모양새가 왠지 정겹기 때문이기도 하다.

잔칫집 마당 가마솥에서 인심 좋게 펄펄 끓던 슴슴한 육수와 장작불의 매캐한 향취는 실로 내게는 그리운 고향의 맛이 아니던가. 몸으로 먼저 반응하는 음식이야말로 최고의 맛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고 보면 나주 곰탕이야말로 이를 충족시켜 주는 음식 가운데 하나다.

식후경을 위한 길을 나선다.

솔밭을 가려면 남평에서 화순 능주 방면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남평에서 능주에 이르는 지석(砥石)천 십리 구간을 드들강이라 부른다. 드들강. 이름은 더없이 정겨우나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홍수로 강이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으려는데 여의치가 않았다. 하여 사람들은 수소문 끝에 숫처녀인 디들을 제물로 바치고 무사히 둑을 쌓을 수가 있었다. 물론 전설같은 이야기지만 디들이 드들로 변하여 강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드들강은 반드시 남평 드들강이라야 제 맛이다. 이곳에 안성현의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를 세운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마치 소월이 이곳 드들강에 와서 이 시를 지은 듯 풍경은 정겹기만 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드들강 유래비 옆으로 자그마한 아치형 목조 다리를 건너면 솔밭이 펼쳐진다. 다리에는 '안성현 노래비 가는 길'이라는 친절한(?) 안내 문구가 적혀있다. 백년은 족히 되었을 잘생긴 소나무들이 인상적인 콘크리트 솔밭길을 곧장 따라가면 솔숲으로 안성현 노래비가 보인다. 현대적 감각이 돋보이는 노래비다.

돌아와 오랜만에 그 노래를 다시 들어본다. 노래를 들으며 문득 '두이노 비가'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간신히 견디어내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 우리 이처럼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깊은 밤.

갑자기 침묵을 깨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마치 나를 위로하듯이 내리는 비. 그 소리에 온통 마음을 뺏긴 나는 또 하루와 작별을 한다. 오늘은 참 긴 하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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