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량 바다에 풀어놓은 내 청춘의 ‘사우사(思友辭)’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비즈월드] # 3-2 나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노정은 대구로 가서 W를 만난 뒤 경남 의창(지금의 창원) 진북면 영학리 학동저수지에서 민물고기 양식업을 하는 D에게로 가는 것이었다. D는 경기 광주 오포읍이 고향으로 양식업에 관심을 갖고 멀리 ‘내 고향 남쪽 바다’가 가까운 그곳까지 내려가 홀로 객지생활을 하고 있었다. D의 편지에서 시인 백석(白石)의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懿州柳洞朴時逢方)’과도 같은 객지의 외로움을 읽었던 나는 지체없이 답장을 썼고. 간단히 짐을 꾸렸다.

동대구역에 내린 나는 W에게 전화를 걸었다. 댄디한 인상의 만년 소년 같은 W는 경북 영양이 고향이나 유학자의 고장 사람과는 다른 친(親)여성적인(?) 성향의 경상도 사나이였다. 제법 잘나가는 유명 통신장비업체의 영남본부 직원이었던 W는 나의 ‘방구(訪邱)’를 환영 한다며 예약한 관광호텔로 안내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각지 않게 W의 환대 속에 대구에서 1박한 나는 D를 만나기 위해 마산행 버스를 탔다.

난생 처음 가보는 길은 낯설었다. 몇 번이나 길을 물어 버스를 바꿔 타가며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D와 또래로 보이는 두 명의 낯선 얼굴이 있었다. 원래가 말수가 적고 사려가 깊은 D는 그리 사교적인 성격은 못되는데 타향살이에 적응하느라 새로운 친구들을 사귄 것도 같았다.

D의 소개로 수인사를 하고 나니 두 친구의 이름은 학승과 경학. 그곳 토박이로 둘 다 우리와는 같은 또래였으며 나와는 또 같은 종씨(宗氏)였다. 일단 인사를 트고 나자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D가 거주하는 2층 건물(미완성 건축물로 뼈대와 대충 방만 꾸며져 있었다)의 주인이며 학동저수지의 권리도 갖고 있는 학승이와 그의 동년배 조카 항렬인 경학이는 생김새는 정반대로 달랐지만(학승이가 장난기 있고 좀 험상궂게 생겼다면 경학은 매끈한 미남형이었다) 모두 굉장한 술꾼이었다. 종씨라 더욱 반갑다면서 시작된 술자리는 엄청났다. 술은 청탁불문. 대개는 소주를 마셨는데 잔은 일반적인 소주잔이 아닌, 냉면 그릇에 가까운 대접이었다. 4홉 짜리(당시는 이 소주도 흔했다) 소주를 두 잔으로 나누어 따르면 끝. (참고로 4홉은 냉면그릇에 가득 차는 양이다. 나는 이것을 두 번 원샷한 경험이 있다.) 그 다음은 그대로 원샷이다. 기가 막혔지만 긴장을 해서인지 취하지도 않고 잘도 넘어갔다.

술이 동이 나자 학승이는 날더러 술을 ‘걷으러’ 나갔다 오자고 했다. 그러더니 자신의 오토바이 뒷자석에 나를 태우는 것이었다. 구멍가게 하나 있을 것 같지 않은 동네에, 있어도 진작에 문을 닫았을 시간에 술을 ‘걷으러’ 간다니? 그러나 의문은 곧 풀렸다. 다짜고짜 불 켜진 집으로 쳐들어간 학승이는 “형수! 여기 서울 친구 안왔나. 술 좀 가와라 빨리. 안 가오면 박살내 뿌리끼다.”

이건 숫제 강도나 다름없었지만 학승이를 이미 아는 마을 사람들은 웃으면서 기꺼이 술을 내어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걷어온 술로 우리는 밤을 새워가며 마시고 또 마셨다.

#4-1

그렇게 D와 그 악동(?)들과 이틀인가를 어울리고는 갑자기 방향을 바꿔 광주로 향했다. 광주에는 국영기업에 간부사원으로 들어간 N이 있었다.

광양 옥룡면 추산리가 고향인 N은 지금의 아내와 당시 사내 연애중이었다. 지난 번 만났을 때는 영암 시종면의 중학교 여선생과 교제를 하더니. 그 사이 파트너가 바뀐 것이었다. 아무튼 스무살 시절, 수원역에서 귀대(歸隊)를 앞두고 낮술에 취해(N은 체질적으로 술이 약하다) “나는 인간이 하사가 아냐!”하며 고래고래 악을 쓰면서 같은 부대 동료인 거제 출신 K에 이끌려 TMO를 타고 떠나갔던 N의 모습 때문에. 그가 고시나 다름없던 국영기업 간부사원공채에 합격했다는 소식은 얼마나 위안이 되었던지.

그의 고향 추산리 마을 앞에는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다. 이 곳은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이기도 하다. N이 말했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당제(堂祭)를 지냈는데 자신이 고등학교 들어가던 해부터 그만 둔 후로는 마을에서 수재가 안 나온다고. 듣고보니 N이 마을 당산나무가 점지한 마지막 수재였던 것이다.

마을 앞으로는 백계산 동백나무숲과 도선국사와 관련한 옥룡사가 있다. 이 동백나무숲을 나는 N과 Y와 함께 N의 고향집을 가다가 들른 적이 있다. 주먹만한 동백은 활짝 피었거나 송이째 낙화해 여기저기 지천인데 봄볕 좋은 동백나무 아래에 우리 셋은 나란히 누워 판소린지, 잡가인지 모를 사설을 되는 대로 불러 제끼고 있었으니. 오, 다시 못 올 그리움이여!

N을 만나니 그는 한창 열애중이라서인지 파트너와 함께였다. 주말에 만나 일요일 아침 N과 그의 연인과 함께 우리는 목포로 갔다. 유달산으로 가서 조각공원에를 들어가 조형물에 의미를 부여하며 즐거워했고. 정상에 올라 암릉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었으며 선창가 선술집에서 회와 소주도 마셨다. 그리고 Y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포터미널에서 나는 N과 작별을 한 뒤 강진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어스른 저녁 기운이 감도는 영산강 하굿둑을 넘어 낯선 길을 달려가니 버스는 이내 강진에 닿았고. 터미널로 Y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Y는 의대 입학을 앞두고 잠시 고향집에 내려와 있었던 모양이다. 마침 저녁 시간이라 Y는 터미널 옆 해태식당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곳에서 ‘개불’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갯것을 처음 먹게 됐다. 이름도 희한한 개불은 아마도 신전면 사초리 개불이었으리라. 이웃인 해남 북일면 내동리와 더불어 이곳 도암만 개펄에서 잡히는 개불과 낙지는 최상품으로 친다. 특히 개불은 이른 봄 ‘개 트는 날’이면 사초리 선착장에서 배로 5분 거리인 복섬으로 나가 채취를 하는데(내동리는 소등섬) 이 개불은 여간 달고 식감이 좋은 것이 아니어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군동면 호계리 호동마을에 있는 Y의 집은 여느 시골의 모습이었다. 새로 지은 듯 제법 번듯한 기와집이 그만그만한 집들 사이로 조금 거슬려 보이기도 했지만 대체로 무난한 풍경이다. 이렇게 강진에를 오게 되니 문득 Y의 고향친구가 생각났다. 2년쯤 전인가, 수원에서 Y와 함께 만나 술을 마실 때. 강진에 오면 고려청자를 한 점 주겠다고 큰 소리를 쳤던 그 친구. 물으니. 경찰시험에 붙어 지리산 자락인 함양 마천파출소로 발령받아 근무중이란다. 청자 하나는 보지도 못하고 날아간 셈이 됐다.

그런데 여기 강진에서 왜, 청자였을까?

지금은 ‘청자골’ 강진으로 불릴 정도로 청자는 강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특급 브랜드가 됐지만 당시만 해도 극소수 아는 사람만 알았다. 그러니 청자를 선뜻 선물하겠노라 했지. 요즘 같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보리 된장국으로 아침을 먹고 Y와 함께 강진 구경 좀 해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에 Y가 해남을 가자고 한다. 해남윤씨인 Y는 자신의 관향을 가보자는 거였다. 아마 강진에는 별로 가볼만한 곳이 생각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대학 졸업반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제주가는 배를 타러 완도를 가면서 해남을 지난 이후로 처음 해남 땅을 밟게 되었다.

#5-1그리고 15년 뒤인 2003년 4월. 해남에 머무르고 있던 나는 산악잡지인 월간 ‘사람과 산’의 동행모델(?)이 되어 해남 아우인 H와J, 그리고 또 다른 J부부와 함께 다산초당과 백련사가 있는 만덕산을 종주하게 됐다. 다산초당을 출발해 동백꽃이 지천인 숲을 지나 백련사에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됐다. 악산과 육산의 배합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 산은 8개의 봉우리를 넘어야 하는 결코 만만치 않은 코스다.

악산인가보다 해서 잔뜩 긴장하여 오르다보면 어느새 임도가 나있는 육산이고. 동네 뒷산 걷듯이 가볍게 봉우리를 올라서면 깎아지른 절벽길이 기다린다. 그렇게 석문까지 가는 길을 땅끝산악회 총무이기도 한 H가 내내 짓궂은 농담으로 작은 활력이 되어준다.

사실 만덕산 동행은 전날 과음 탓이 컸다. ‘사람과 산’ 해남주재기자인 친구 C가 마련한 술자리에서 그만 호기롭게 동행을 약속했던 것. 이에 기자들은 반색을 했고. 다음 날 일찌감치 사무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술이 덜 깬 상태에서의 산행은 얼마나 곤혹스러웠겠는가. 다행히 땅끝산악회원들과 어울려 틈틈이 산행을 다녔고. 혼자서도 해남읍의 진산인 금강산을 오르내려 생각보다 큰 부담은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침내 종착지인 석문(石門)으로 내려오니 C가 싱글거리며 마중을 한다. 거의 삼국지 동탁 수준의 몸집을 자랑하는 C는 땅끝산악회 회장인데 몸집이 커서 대개 후미에서 약게 산행을 한다. 그런데 이날은 그마저도 생략하고 해장으로 면피를 하려고 나온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나는 주작산과 함께 강진의 남쪽 뼈대를 이루고 있는 만덕산을 흠뻑 느끼면서 강진과의 격렬한 첫인사를 나눈 셈이 됐다.

#5-2

운좋게 언론고시라는 관문을 통과하고 수습기자로서 정신이 없던 어느 날이었다. 수위실로부터 손님이 찾아왔다는 연락이 왔다. 누굴까? 딱히 약속을 한 일도 없고 해서 긴가민가하며 현관을 나서니. 이게 누구? 학승이와 경학이었다. 낮도깨비들인가 다시 봐도 틀림없는 그들이었다. 학승이는 이런 내가 재밌다는 듯 와락 달려 들더니,

“친구가 기자가 됐다 카는데. 내 우짜 가만 있을 수 있나” 하며 나를 얼싸안고 반가워하는 것이었고. 경학은 그저 빙그레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 옆으로는 ‘삐까번쩍한’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서있었다. 당시로는 최고급 기종인 코티나 마크 IV였다. 아니 이게 무슨? 입은 걸로 봐서는 동네에서 어슬렁거리던 차림새 그대로인데. 이런 고급 승용차를 몰고 나타나다니. 그동안 양식장 사업이 대박을 쳤을리도 없고, 대체 뭔 일이라냐?

“이 차 말이가? 누가 세와 놨길래. 그냥 마, 확 끌고 와삣다.”

들어본 즉슨, 이랬다. 둘이 오토바이를 타고 모처럼 시내를 나갔는데 우연히 잘 풀린 선배 하나를 만났단다. 그와 낮술을 마시기로 하고 근처 식당에를 들어가 대작을 하다가 소위 ‘기자 끗발’을 들었단다. 그러자 문득 내가 생각났고. 생각나니 보고싶어지더라는 것이었다. 해서 선배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그대로 차를 몰고 올라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기자가 된 것을 봤으니 이제 내려가봐야겠다고 했다. 속전속결. 도무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무차별로, 거의 테러에 가까운 우정을 선사한 학승이와 경학은 정말 떠나려는지 내게 악수를 청한다. 이때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나는, 마침 점심 때이기도 해서 큰 맘 먹고 갈빗집으로 이들을 데리고 갔다. 이처럼 눈물겨운 우정을 보여준 친구들을 어찌 그냥 보낼소냐. 비록 수습이라 선배들 눈치가 보이기도 했지만 낮술도 마셨다. 안 그러면 이 눈물겨운 우정에 금이 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마냥 붙잡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술이나 깨서 내려가라고. 이들을 사우나로 들여보냈고. 어찌하다 보니 이것이 이들과의 마지막 장면이 됐다.

후일담이지만 우연히 식당에 갔다 마산이 고향이라는 주인아저씨와 이야기 끝에 학승이 소식을 듣게 됐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참 넓고도 좁다. 학승은 결혼해 부산으로 가서 잘살고 있다고 했다. 이제 얼굴에 대한 기억도 많이 희미해졌지만 꼭 한 번은 만나고 싶은 친구이기도 하다.

그 때 학승이는 머리가 짧았다. 나를 보러 상경하던 해. 봄에 학승은 결혼을 했다고 했다. 사실 연애만 하려고 한 것이 일이 커져(?) 갑자기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결혼식 날짜가 잡히던 날. 학승이는 머리를 빡빡 밀었다. 집안의 막내로 위의 형과 누나들은 모두 대학을 나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던 반면에 툭하면 부모 속을 썩이던 학승이었다.

학승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마산의 명문 상고를 다녔던 학승이는 ‘코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싸움이 붙으면 앞장 서서 양 소매로 코를 훔치는 버릇이 있어 별명이 됐단다. 고 2때. 친구네 집 소 판 돈을 훔쳐(물론 친구가 한 짓) 부산으로 가출을 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친구가 맘이 바뀌어 다시 그 돈을 갖고 집으로 돌어가는 바람에,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학승이.

오기가 발동한 학승이는 중국집 배달부부터 시작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 하게 된일이 ‘머구리’라는 시체를 인양하는 잠수부 일이었다. 험한 객지생활에 어느 정도 이력이 붙었을 때. 갑자기 집 생각이 나더란다. 그렇게 어찌어찌 다시 돌아간 집에서 ‘신검’도 받고. 방위 복무도 마친 학승이는 부친에게 저수지 사용권을 양도해 달라고 하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그러자 학승이는 아침마다 부친의 밥상머리에서 소주를 나발부는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제 풀에 그러다 말겠지 생각한 만행이 무려 열흘 넘게 계속되자 부친은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저수지 사용권을 받아 낸 학승이는 저수지 가에 집을 짓기 시작했고. 양식업을 하는 나의 친구 D와 인연이 됐던 것이다.

경상도 사나이의 거침없는 성격은 학승의 연애의 기술에서도 잘 드러난다. 어느 날 마을로 예쁜 아가씨가 놀러 왔단다. 도회적인 세련된 외모에 관심이 갔던 학승이는 다짜고짜 오토바이에 태우고는 그냥 내달렸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아가씨는 미스 경남이었다나 뭐라나. 물론 100퍼센트 들은 얘기라서 사실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지만 무슨 상관이랴.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6-1

나는 지금 강진버스터미널에서 마량(馬良)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1시 30분 당목행 직행버스다. 마량과 고금도, 고금도와 약산도 간에 다리가 놓이면서 광주에서 강진을 거쳐 약산도 당목항까지 운행되는 버스 노선이 생긴 것이다. 물론 마량~고금도~신지도~완도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환상의 바닷길 노선도 있다.

마량은 강진의 대표적인 어항으로 남도의 미항(美港)으로 꼽히는 곳이다. 강진이 제주(耽羅)로 가는 나루라 하여 탐진(耽津) 이라 불리던 시절. 마량이 바로 탐진이었다. 내가 탐진을 알게된 것은 바로 ‘탐진최씨’이셨던 나의 증조모님의 지방(紙榜)을 쓰면서부터다. 필체가 괜찮아 보였는지 중학시절부터 집안에 제사가 있으면 곧잘 지방을 쓰고는 했는데 이 때 탐진이라는 곳을 알게 됐다. 그 탐진은 충남 당진(唐津)이 당나라로 가던 나루였듯이 탐라국으로 가던 나루, 즉 강진이었던 것이다. 통일신라 때 탐라국의 사신이 조공을 하러 오면 이용하던 나루라 해서 탐진이라는 설이 있다. 이곳 마량항에서 해류를 따라가면 제주에 닿는다고 한다.

이 탐진이라는 이름은 지금은 강이름으로 남아있다. 장흥과 영암의 경계를 이루는 국사봉에서 발원해 장흥, 강진을 적시고 남해로 흘러드는 탐진강(51.5km)이 그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예양강(汭陽江)이라 표기된 이 강은 영산강, 섬진강과 더불어 전남의 3대강으로 꼽힌다.

‘예양’이라는 지명은 장흥의 고읍(古邑)이 관산읍이었던 점으로 미뤄볼 때. 지금의 장흥읍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장흥읍에는 예양리가 있고. 벚꽃으로 유명한 예양공원과 목은 이색 등을 배향한 예양서원이 있다. 또 해남 계곡면 덕정리 둔주포에는 ‘삼군사(三君祠)’에서 ‘예양사(汭陽祠)’로 편액을 바꿔 단 장흥임씨 사당이 있다. 예양군(汭陽君)은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인 임발영(林發英)의 군호(君號)다.

그러나 정작 이 탐진강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곳은 이웃인 장흥이다. 장흥은 태국의 설날(4월 13일)을 전후해 열리는 ‘송크란’의 물 뿌리기를 연상시키는 ‘정동진 장흥 물축제’를 2008년부터 해마다 7월말부터 8월초 사이에 일주일간 탐진강과 편백숲 우드랜드 일원에서 열고 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강진 대구면 사당리 청자촌에서는 ‘흙ㆍ불 그리고 사람’을 주제로 강진 청자축제를 역시 일주일동안 연다. 청자축제는 강진군문화제였던 금릉문화제를 1997년부터 명칭을 고려청자의 발상지로서의 강진을 알리기 위해 ‘청자문화축제’로 바꿔 진행해 오다 2009년에 다시 청자축제로 변경,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곳 청자축제장에도 150m길이의 대형 워터 슬라이드가 설치돼 있어 축제에 즐거움을 더한다. 조선시대 장흥부였던 이 지역은 물과는 매우 밀접한 인연이었음이 축제를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7-1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강진의 숨은 보석은 바로 칠량면 명주리 일원의 ‘초당림(草堂林)’이다. 초당림은 여의도 3배 면적인 320만평의 임야에 440만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는 국내 최대의 인공림. 백제약품과 초당약품, 초당대학교를 설립한 초당(草堂) 김기운(金基運)이 1968년부터 50년간 직접 심고 가꿔 온 초당림은 편백나무, 백합나무, 테다 소나무 등이 주요 수종. 초당림에는 2.5㎞에 달하는 그림같은 데크길이 조성돼 최고의 힐링의 공간으로 눈길을 끈다 하지만 아쉽게도 초당림은 일반에 공개가 안 된 비밀의 정원. 1년에 단 이틀 문을 연다. 만약 초당림이 경기 광주 곤지암의 화담숲처럼 일반에 공개된다면. 단숨에 최고의 힐링 공간으로 사랑받을 것이 틀림없다. 우리나라 산림면적의 8000분의 1에 달한다는 초당림이 아쉽지만 비밀의 정원으로, 인간의 때가 덜 묻기를 바라는 마음 없지 않으나. 과연 그럴 수 있을는지.

초당림을 얘기하면서 김기운이라는 인물에 대해 잠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21년 무안 출신인 김기운은 소학교를 나와 일본인이 운영하던 목포의 한 상점에서 의약품을 취급하는 일을 했다. 해방 후인 1946년 8월. 목포 남교동에 백제약방을 연 김기운은 가마니로 돈을 쓸어 담을 정도로 돈을 벌었다. 돈 세기가 귀찮아 돈을 저울에 달아 셀 정도였다. 그러다 서울 종로5가에 백제약국을, 그리고 백제약품과 자회사인 초당약품을 창업하면서 백제약품은 2016년 연매출 1조원을 넘는 굴지의 제약회사로 성장했다. 또 1980년에는 고향인 무안에 백제여상(현 백제고)를. 그리고 73세인 1994년에는 역시 무안에 초당대를 설립한다. 백제여상과 초당약춤은 여자 핸드볼 팀으로 유명했다.

#7-2

강진과 장흥의 닮은 꼴은 또 있다. 마량항에서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놀토 수산시장’이 그것인데 이것 역시 장흥읍의 ‘정동진 토요시장’과 닮았다. 이곳 마량항의 식당에서 시그니처 메뉴로 내놓고 있는 ‘된장물회’와 ‘소낙비(소고기 낙지 비빔밥)’도 장흥 회진면이 원조인 ‘된장물회’와 정동진 토요시장의 ‘한우 키조개 삼합(한우+키조+표고버섯)’과 명칭과 구성조합에서 여러모로 닮은 모습이다.

마량항의 놀토 수산시장은 4월초부터 10월말까지 매주 토요일과 청자축제기간을 합쳐 모두 39회에 걸쳐 운영된다. 마량놀토수산시장의 5대 먹거리(오감행복회, 된장물회, 삼합라면, 소낙비, 장어탕)로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7대 살거리(전복, 낙지, 바지락, 꼬막, 김, 미역, 다시마)로 눈을 즐겁게 한다. 특히 봄에는 갑오징어, 주꾸미, 여름에는 농어와 전복, 갯장어, 된장물회, 가을에는 전어와 꽃게, 낙지, 대하 등을 할인 판매한다는 것이다.

놀토수산시장이 열리기 전부터 끝자릿수가 3일과 8일에 열리는 마량장은 인근 대구, 칠량, 장흥 대덕읍 뿐만 아니라 고금도 약산도, 신지도, 생일도, 금일도 등 완도의 섬주민들도 즐겨 찾는 장시였다. 지금은 고금대교와 약산대교, 신지대교로 연결돼 자동차로 드나드는 섬이 되면서 예전의 명성은 다소 쇠퇴한 감도 있으나 마량항이 ‘남도의 나폴리’로 소문이 나면서 관광객이 꾸준히 증가 추세에 있다.

놀토수산시장의 개장에 맞춰 열리고 있는 토요음악회는 마량항의 특설무대에서 진행된다. 커다란 범선의 돛을 형상화 한 공연장은 인상적. 무대 주위로는 나무로 된 일체식 탁자가 즐비해 멀리 고금대교가 걸려있는 마량만의 풍광을, 전망대에서는 천연기념물인 까막섬을 조망할 수가 있다. 해찰 부리기 안성맞춤인 이곳에는 또 방갈로도 갖춰져 낙조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마량 바다의 진수를 만끽할 수가 있다.

토요음악회 무대 주위로는 강진이 낳은 시인 김영랑과 김현구의 시비가 있다. 생몰연대마저 같은(1903~1950) 두 시인은 ‘시문학파’ 동인으로 활동했다. 김영랑의 강진읍 남성리 생가 앞에는 시문학관이 건립돼 있다. 김현구의 생가는 강진읍 서성리에 있다. 강진군은 이들 시인을 기리기 위해 거리 이름을 ‘감성 강진의 하룻길’이라 짓고 벽화와 조형물로 꾸며놓았다.

마량버스터미널로 돌아오니 할머니 한 분이 혼자 앉아 있다 반갑게 맞는다.

“표 파는 아저씨는 방금 문 잠그고 밥 먹으러 갔어요.”

그러고 보니 아까 버스에서 내려 터미널에서 만났던 매표소 아저씨가 안 보인다.

“어디 가세요?”

“예. 대덕 신리 가요.”

“장흥 대덕이요?”

“예. 예서 가차워요.”

올해 여든이라는 할머니는 장흥 대덕읍 신리에서 태어나 한 동네 사람의 중매로 결혼해 80평생을 고향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대덕 신리’는 모르지만(나의 외가도 신리다) 익숙한 이름이므로 그냥 알은 체를 했다.

“어디 다른 곳에서는 안 사셨어요?”

“어디요. 태국도 가보고 일본도 가봤어요. 먼저 번에는 딸 애가 미국도 가자는데 비행기를 너무 오래 탄다고 해서 관뒀어요.”

할머니는 자식들이 해외여행을 시켜준 것이 몹시도 자랑스러운지, 한 마디를 물어보면 중언부언 얘기하더니.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약방에 가서 소화제 좀 사갖고 와야겠다며 자리를 뜬다.

그리고 버스 시간이 되자 밥 먹으러 갔던 매표소 아저씨가 돌아왔고. 강진읍으로 나가려는 마량주민으로 보이는 서 너명의 중년이 들어서며 갑자기 터미널엔 인사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손잡고 고막다리를 건너 나주를 오고갔다는 기사양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서일까. 함평역에 내려 요금을 치를 때 보니 생각 보다 좀 과한 것 같다. 괜히 학다리를 물어봤나.

그래도 마무리는 좋았다.

“잘 살펴 가시고. 이 담시 함평에 또 오믄 불러 주시요,”

그러고는 차를 돌려 광속으로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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