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비즈월드] “오메! 좋은 거. 쩌그 저 까막섬과 해찰 좀 부려 볼라요.”

마량 바다에 풀어놓은 내 청춘의 ‘사우사(思友辭)’

#1-1

나의 강진에 대한 시작은 ‘친구였던’ Y로부터다. 그를 굳이 ‘과거형’으로 분류하는 것은 90년 봄인가, 그가 다니던 전북 익산의 대학교로 찾아가 캠퍼스 강의실에서 잠깐 만나고는 그 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유감스럽지만 Y는 추억의 친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만나는 일은 없다는 말이냐? 그것도 사람의 일이라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진행상황을 감안하면 솔직히 ‘과거형’으로 Y를 남겨 두는 편이 낫다. 그것은 아마 그가 과거 보다는 현재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리란 생각에서다. 그런 그에게 굳이 과거를 들먹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Y와는 80년대 초반 수원에서, 역시 친구였던 K와의 인연으로, 그의 고교 동기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홀로 떨어져 앉아 있던 그를 발견하고는, 다가가 친구가 됐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Y에게 편지가 왔고 나는 즉시로 답장을 썼다. 주로 인생을 달관한 듯한 현학적인 문장들을 주고 받으며 틈만 나면 나는 그가 군복무를 하고 있는 원주로 찾아가 그의 자취방에서 머물다 오고는 했다.

“인생은 술 깬 아침이야.”

술이 약했던 Y는 비록 술은 곤혹스러워했지만, 술자리에서만큼은 기꺼이 어울리며 청춘의 갈증을 이런 시니컬한 언어의 유희로 풀고는 했다.

Y는 군대생활을 하면서 Y대 원주캠퍼스 경제학과에 입학을 했다. 당시는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강진이 고향인 Y는 자신을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라며 남다른 사회의식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당연하게도 Y는 데모를 했다. 그것도 앞장서서 했다. Y는 데모를 하면서 성명서를 썼다. 그는 데모대의 주동자가 됐고. ‘사복 형사’들은 그의 강진 고향집까지 사찰했다. 공부 잘하던 둘째 아들이 그저 대학을 졸업해 남들처럼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를 바랐던 Y의 아버지는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향의 아버지에게 걱정을 들은 Y는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그런데 교수의 말은 천만 뜻밖의 것이었다.

“의대를 가게.”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과도 같았다.

“그래야 자네 인생이 편해.”

무슨 예언과도 같은 교수의 말에 Y는 고향의 부모님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러자 며칠 지나지 않아서 아버지가 원주로 Y를 찾아왔다. 그리고 품속에서 꼭꼭 감싼 뭉치 하나를 꺼내 Y에게 건넸다.

“애비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네 스스로 알아서 해라.”

소 판 돈 96만원이었다.

#2-1

강진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남도 답사 1번지‘로 소개가 되기 전만 해도 거의 관광의 불모지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월출산 자락의 고찰 무위사와 만덕산의 백련사와 같은 절집부터.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인 사의재와 다산초당, 영랑 생가, 그리고 강진을 대표하는 브랜드인 고려청자 도요지가 있는 대구면과 마량항, 하멜이 있던 병영성 등, 차차 그 폭을 넓혀나가더니 지금은 가우도(駕牛島)를 중심으로 사철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이전의 강진은 유감스럽게도 ‘강진 갈갈이 사건’이라는 불명예스런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이는 1970년대 라디오 인기프로였던 ‘법창야화(法窓野話)’에 제 1화로 1930년대 말에 일어났던 이 사건을 극화함으로써 당시만 해도 변방이나 다름없던 강진을 공포스런 고장으로 소개하는 어처구니 없는 계기가 됐던 것.

그러니 강진군에 있어 ‘남도 답사 1번지’라는 타이틀은 이러한 앞서의 오명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실로 ‘역사적인’ 사건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강진은 크게 문화유산 답사기 전과 후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또 대구면 저두리에는 탁 트인 강진만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고바우공원이 있다. 여기가 요즘 말로 강진의 ‘핫 플레이스’다. 나는 작년 여름 해남 아우 J와 장흥 회진으로 된장물회를 먹으로 갔다가 남도길에 밝은 J의 안내로 이곳을 들르게 됐다.

“형님 여기가 겉보기에는 그래도 꽤나 근사혀요. 아마 내려가 보면 고맙다고 할 것이요”하고 카페 주인에 대한 얘기며, 이런저런 선험자로서의 상당한 자부심마저 드러내는 것이었다. 과연 J의 말대로 고바우공원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분홍나루’라는 카페가 있는데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바라보는 강진만의 풍광이 그야말로 기가 막히다. 이곳에서는 멀리 해남의 두륜산과 완도의 상왕봉, 그리고 해남과 강진의 경계인 주작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특히 해가 질 무렵의 낙조는 자연이 연출하는 한편의 감동 드라마. 탄성과 함께 이내 할 말을 잊는다.

#2-2

그렇게 아버지가 다녀가고 난 뒤. Y는 학교를 그만 두고 서울 신촌 대흥동에 있는 한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대입을 거쳐 스물 일곱 나이에 익산에 있는 의대에 입학을 한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생활은 입주 가정교사 형식으로 해결을 하며 ‘북극성’이란 동아리를 만들어 의대생들의 맏형노릇까지, 그렇게 나름대로 만학이지만 실속있게 대학생활을 마친 Y는 1년 늦게 의대로 학사편입한 익산 유력 집안의 딸과 열애 끝에 결혼도 하고 모교 교수로 자리를 잡는다.

#3-1

나에게 87년 가을은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는 조용필의 넋두리 가사처럼, 청춘의 한 페이지가 속절없이 찢겨진, 나로서는 청춘의 마지막 선택을 해야만 하는 절박한 그 무엇이 필요한 시기였다.

‘조직위원회’에서는 동년배의 여선배로부터 “OO씨는 조직생활에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하는 말에 조직을 떠났고. 안산에 있는 공장에서는 “형님은 이런데 계실 분이 아닌데. 나가셔서 더 큰 일을 하세요”하는 공장 아우들의 떠밀림으로, 그야말로 ‘자의반타의반’ 기로에 서게 된 것이었다. '조직'의 여선배는 S여대 불문과 출신으로 나에게 주려고 점심 도시락을 싸올 정도로 나름 은근한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름대로 선배 대접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냥 동년배의 여직원처럼 대한 것이 나의 무심함과 맞물려 ‘조직 부적격자’라는 심판(?)으로 결말을 맺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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