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덕의 南道春風] 18(하)-“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 했거늘, 어리석은 중생들이 그걸 모르네.”
[이해덕의 南道春風] 18(하)-“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 했거늘, 어리석은 중생들이 그걸 모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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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비즈월드] 몇 번이나 근처를 지났으면서도 정작 찾아가지 못했던 함평 학교면 고막리에 있는 고막원천 석교를 찾았다. 예전 영산강 뱃길이었다는 것이 도대체 실감이 나지 않는 고막원천은 어린 시절 뛰어 놀던 개울마냥 낮게 흐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마을의 개구쟁이들이 몰려나와 벌거숭이가 되어, 돌다리에서 물속으로 ‘퐁당’ 하고 뛰어 내리며 자맥질과 물장구로 신나게 한낮의 정적을 깨울 것만 같은 데. 제방둑에는 게으른 황소는커녕 행인의 발길마저 끊긴 지 오래. 마을 정자는 찾는 이 하나 없이 낡고 바랜 채 적막하다. 한 시절 북적였을 마을은 이제는 빈집이 늘어나면서 폐촌의 위기에 놓여 있으니. 750년을 묵묵히 지켜온 돌다리는 지금 과연 어떤 마음일까?

돌다리는 무안 승달산 법천사의 고막(古幕)대사가 도력으로 하룻밤 새에 놓았다고 한다. 하기사 화순 운주사 천불천탑도 도선(道詵)국사의 하룻밤 일이라는데. 돌다리 하나쯤이야 법계(法界)의 신통력으로 식은 죽 먹기일 터. 여하튼 우리네 땅에 어지간한 옛 구조물은 만드는데 하룻밤을 넘기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무안 승달산(僧達山). 목포대 뒷산인 승달산은 노령산맥 4대 명혈(名穴)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일설에는 천하대명당이 숨어있다고 전해져 풍수가들이 이 혈처를 찾느라 무른 메주 밟듯 오르 내렸다는 산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보면 ‘승달산은 연징산에서 뻗어 나오며 법천사(法泉寺)의 으뜸이 되는 산줄기를 이룬다. 관아의 남쪽 20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송나라 때 임천사의 승려 원명이 바다를 건너와 이 산을 택해 풀을 엮어 암자를 지었는데, 임천에 있던 제자 500 명이 그를 찾아 함께 득달했으므로 그대로 승달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기록이 있다.

서산대사가 지었다고 전하는 ‘회심곡(回心曲)’에 ‘깊은 물에 다리 놓아 월천공덕(越川功德) 하였는가/ 목마른 이 물을 주어 급수공덕(汲水功德) 하였는가/ 병든 사람 약을 주어 활인공덕(活人功德) 하였는가’라는 대목이 있다. 말하자면 물을 건네주는 것이 불자의 이타행(利他行), 즉 큰 보시(報施)로 여겨졌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곳곳에 산재한 돌다리들은 대개가 대사의 공력으로 놓여졌음을 보게 된다.

여기 고막원 석교. 일명 ‘독다리’, ‘똑다리’ 또는 ‘떡다리’로 불리는 이 돌다리는 우리나라에서 축조연대가 밝혀진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다리다. 보물 1372호.

한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몇몇 문헌에는 ‘고막교(古幕橋)’라는 기록만 보일 뿐, 누가 언제 축조했는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2001년 다리를 완전 해체 보수하면서 교각 아래 바닥 기초의 나무말뚝을 탄소연대 측정한 결과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인 대략 700년 전에 축조된 것으로 나타났다.

어찌됐든 고막석교는 남한에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유일한 널다리(板橋)다. 전설이든 야사든 이 다리를 고막대사가 하룻밤 도술로 놓았다는 그 말을 나는 교훈적으로라도 믿고 싶어진다.

“어리석은 중생들이여. 서두르지 말게. 못믿을 세상. 돌다린들 어찌 대수겠는가?”

그래도 돌다리는 끄떡없이 긴긴 세월을 버텨주고 있으니. 그 불가사의한 돌다리의 뚝심은 고막대사의 도력이라야 설명이 가능할 밖에. 내친김에 드는 의문은 벌교 꼬막 또한 고막대사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은 아닌지? 고막대사가 송광사로 가던 길에 여자만 갯벌에 지천인 희한한 조개를 보고 어쩌구 저쩌구...혹시 모르지. 지금의 농담같은 이야기도 먼 훗날엔 야사(野史)가 되어 있을 지도. (꼬막의 본래 표준어는 고막이었다.)

믈론 충북 진천 문백면 미호천의 농(籠)다리가 천 년 돌다리로 알려져 있지만 ‘전설의 고향’ 급의 여러 이야기만 전할 뿐, 구체적이지는 못하다. 또 이 다리는 일반적인 다리의 모습이 아닌 징검다리에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다. 다만 28숙(宿) 별자리를 상징한다는 농다리의 교각(24개가 남았으나 4개를 새로 쌓았다)은 다리를 쌓을 때(이 다리는 이 표현이 적절하다) 음양(陰陽)의 조화를 계산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농다리를 세 번인가 찾아갔었다. 농다리를 건너가는 동안 물소리가 조금은 부담스럽게 들리지만 다리 건너 초평저수지로 오르는 길이 좋았다. 이 길을 풍수지리상 용의 허리에 해당하는데 길을 내면서 훼손한 탓에 비가 잦다고 한다. 하지만 길의 끝에서 만나는 초평지는 장관이었다. 기왕에 농다리를 갔다면 반드시 들러보길 권한다.

또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진천을 지나며 눈여겨 보면 농다리가 있는 곳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속도에 밀려 스치듯 지나는 것 보다는 직접 찾아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 좋다.

고막원 석교가 놓인 고막원천은 함평군과 나주군을 경계로 흐르는 영산강의 지류다. 지금은 영산강 하구둑으로 뱃길이 막혔지만 함평에서 나는 농산물이 고막원천을 따라 외지로 나가던 주요 뱃길이었다.

함평군과 나주군을 잇는 이 다리는 알려진 대로 고려 원종 14년(1273) 고막대사가 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다리는 총길이 19.2m, 폭 3m, 높이 2.1m로, 목조가구식을 석조로 바꾼 형태를 취하고 있다. 5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돌을 우물마루형식으로 짜맞췄다.

다리 기둥에 목조가구(木造架構)의 결구(結構)수법인 주두(柱頭)가 있고 그 위에 놓인 상판은 마치 한옥 집의 대청마루와 같이 짜여있다. 상판은 어찌나 촘촘한지 쌀 한 톨이 새지 않을 정도여서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아 멍석 대신 아곳에서 벼를 말리고는 했다.

상판은 보기에 그냥 돌덩이를 투박하게 놓은 듯 보이지만 여기에는 신비로운 기술이 슴어있다. 세찬 물살에도 오늘날까지 끄떡없이 버티고 있는 데는 고막석교만의 특별한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그럼 그 ‘무엇’은 무엇일까?

2001년, 고막석교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당시 국내 최고의 기술자들은 이 다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고막석교는 지반보강을 위해 나무말뚝을 촘촘히 박고, 그 위에 돌을 일정한 두께로 절묘하게 깔아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여기에 기둥과 상판축조를 목조가구의 결구법을 응용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단단해 지도록 했다. 그러나 일제시대 두 번의 보수를 거치면서 본래의 품격이 크게 훼손됐다는 점은 안타깝기만 하다.

이곳에는 1910년대만 해도 쌀 100섬을 실은 배가 영산강을 따라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상판에서 쌀이 한톨도 빠지지 않는 정교한 다리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일제 때 보수공사를 한 후부터 다리는 삐걱거렸고, 툭하면 보수를 해야 한다며 사람들의 손을 탔다.

예전에 고막다리에 큰 배가 들어오면 다리 주변에 장이 서곤 했다. 마을 사람들은 떡을 해 다리를 건너 나주와 영산포로 팔러 다녔다. 논에서 일하던 농부들은 점심을 먹고 난 뒤에 돌다리 위에 누워 낮잠을 청하고는 했다. 저녁이면 물살이 세어 모기와 뱀이 없는 다리가 사랑방 역할을 했다.

이제는 이런 풍경은 볼수가 없다. 고막다리 위로 난 나주-목포간 국도 1호선이 다리 역할을 대신 하고 있다. 다만 석교 옆 제방에 세워진 글씨조차 알아 볼 수가 없는 고막석교 유적비만이 옛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이쯤 해서 돌다리가 놓인 고막원천의 족보를 대략 훑어본다.

이전한 상무대가 있는 장성 삼서면 학성리 태청산 남동쪽 능선 골짜기 장승백이골에서 발원한 고막원천은 각오치마을을 지나 유평리 유천마을 앞에서 방향을 바꿔 남류해 유정제로 들어가 숨을 고른 뒤, 유평천, 대도천, 삼서천, 용암천, 금석천, 해보천, 식지천, 월봉천을 차례로 합하여 내려오다 함평 나산면 덕림리 백양동마을 앞에서 동류한 평릉천을 더해 나주와 함평의 땅금이 되면서 남류, 나주 문평면 송산리 지산마을 뒷산인 지산봉 서쪽 밑을 타고 내리며 서쪽으로는 함평 대동면 상옥리를 대하고 내리다 학교면 복천리를 대하면서 장동마을 앞에 이르러 북동쪽에서 내려온 안곡천을 합한다.

이어 고막리 고막원 석교를 지나 1번 국도와 호남선 철도 밑을 타고 송암, 광진, 나주 다시면 송촌리 시수협곡, 학교면 석정리 원석정, 다시면 동당리 청림마을을 거치며 여러 번 굽이돌면서 동당리 석관정(石串亭) 서쪽에서 고막원천은 100리(39.3㎞) 소풍을 마치고, 비로소 영산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함평터미널에서 내려 택시를 탄다.

“고막리 석교 갔다 함평역까지 얼맙니까?”

나의 말에 무료하게 앉아 손님을 기다리던 시원한 대머이에 인상좋게 생긴 기사 양반 얼른 일어나 반가워서 하는 말.

“아따. 일단 타시요. 택시요금은 기계가 말해중께.”

대개 지역택시들은 나름대로 약정된 요금을 적용하는 경우가 있어 물어본 것인데 미터기로 간다는 것이었다. 60줄로 보이는 택시기사는 함평 토박이라고 했다. 고막석교를 간다니까 ‘문화원’에서 나왔느냐며 관광안내 역할을 자청해서 덤으로 한다.

저기 큰 나무 옆으로 보이는 건물이 예전 학교역이 있던 곳이고. 저기가 면사무소. 저기 저 마을은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살던 마을로 박정희대통령이 똑같이 집을지어 줘서 살게 했고. 저거는 소, 돼지를 잡는 도축장...

기사양반의 수고에 한마디를 보탠다.

“학교역(학교역은 함평역으로 바뀜)에 있던 급수탑은 잘 있는가요?”

“아, 글씨. 고것이 안보여요. 아마 때려 부순 모양이요.”

“...”

함평역이 있는 학교면은 국도 1호선과 23호선이 동서남북으로 관통하는 사통팔달의 교통 요지역할을 한다. ‘학다리’로 친근한 학교(鶴橋)에는, 그러나 정작 학다리는 없다. 동쪽으로 고막원천이, 서쪽으로 함평천이 흐르는 학교면은 지형이 학을 닮았다 해서, 또는 예전 영산강 물길이 양양하던 시절. 학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막원 석교가 학다리는 아닐까?

택시에서 내리기 전 나는 기사 양반에게 슬쩍,

“학다리는 어디 있나요?”하고 물어봤다.

“글씨요... 여기저기 다리는 여러 개가 있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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