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비즈월드] “한 번 속으면 속인 놈이 나쁜 나쁜 놈이고. 두 번 속으면 속은 사람이 바보고. 세 번 속으면 모두가 공범(共犯)이 된다.”

6.13 지방선거 패배에 책임을 지고 자유한국당 대표에서 물러난 홍준표가 SNS에 올려 화제가 됐던 말이다.

세간에서는 그를 막말이나 일삼는 거친 정객쯤으로 폄하하고. 정부와 여당을 지지하는 세력은 그를 형편없이 조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비록 그가 정제되지 않은 화법으로 많은 이들의 비호감은 샀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만큼 현실을 정확히 읽고 소신있게 의견을 밝힌 사람은 없다고 본다. 단지 그는 원외 당대표로서 나름대로 세몰이를 하려 무리수를 두었고. 이의 연장선상에서의 독선과 공천 갈등 등으로 결국에는 쓴 잔을 마셨다.

그는 좀 더 신중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좌파라고 여기던 정부의 대북정책과 관련해 강력한 경고음을 보낸 이 말은 머지않아 그를 조롱했던 이들을 몹시도 부끄럽게 만들는지 모를 일이다. 다행히 북이 개과천선을 해서 완전한 비핵화(非核化)로 진정한 평화를 이룬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북의 체제 특성상 절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사족이지만 나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가끔씩 나름대로의 뉴스 채널로 대략적인 정세는 들여다본다. 누가 옳고 그른지의 판단 정도만 한다. 나는 흔히 말하는 진보도 보수도 관심없다. 아니 우리나라에서의 진보나 보수의 개념은 이미 상식적으로 재단 불능일 만큼 부패해졌다고 본다. 사회 정의의 진실은 교언영색(巧言令色)과 궤변(詭辯)으로, 참과 거짓의 경계마저 모호해진 상태다. 그러다 보니 ‘가짜 뉴스’가 버젓이 판을 친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이러한 가짜 뉴스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제대로 걸러지지 않은 ‘아니면 말고’식의 무책임한 비방(誹謗)과 독설(毒舌)은 자칫 치명적일 수 있는 사회악(社會惡)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끼리끼리 편을 가르고. 일방적인 맹신과 극단적인 배타성으로 무장함으로써 상식은 조롱당하고 확인도 실현도 되지 않을 거짓놀음에 취해 집단 광기마저 보이고 있다. 참으로 개탄스럽고 무서운 세상이다. 세상이 이러다 보니 인간관계마저 아침에 멀쩡하다가도 저녁 때 언제 그랬냐는 듯 깨져버리기 일쑤다.

이것은 친족간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가령 반갑게 만난 자리라도 상대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조심스럽게 에둘러 탐색하고는 아니다 싶으면 이내 서먹해지는 것이 요즘의 풍속도가 됐다.

우리는 정작 두드려야 할 돌다리는 두드릴 생각조차 않고 인간관계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갈등의 골만 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여기 고막원 돌다리를 바라보며 ‘두드리고 건너라’는 결코 녹록지 않은 그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것이다.

돌다리 속담을 접할 때마다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나의 죽마고우인 N이다. 거의 50년 지기인 N은 그야말로 돌다리 속담과 딱 맞아 떨어지는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 매사가 신중한 원칙주의자다. 그러다 보니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대개 엇갈린 평가로 그의 됨됨이를 폄하하려 드는 경우도 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N은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저간에 세기의 맞대결이 예고돼 있어서인지 복싱의 인기는 대단했다.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N은 장난삼아 날더러 복싱을 해보자고 했다. 안경을 낀 데다 운동에는 영 젬병이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장난에 응해 주었는데 원체 운동신경이 둔했던지 N의 주먹을 피하지 못했고. 오른쪽 안경알이 깨지고 말았다. 맞춘 지 얼마 되지 않은 안경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그러자 N은 나를 침착하게 달래며 같이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다. 자기가 잘못을 했으니 우리 부모님께 말씀 드려야 한다면서 말이다. 나는 N의 당당함에 가까운 용기에 안경이 깨진 줄도 모르고 애써 웃으며 그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가 있었다.

그 일이 있고는 거의 단짝처럼 붙어 다녔다. 그리고 다음해 여름. 유난히 군것질을 좋아하는 J가 고구마를 학교에 가지고 왔다. J는 나와 같은 방향이어서 하굣길에 새터고개라는 곳에서 쉬었다 가고는 했다. 나와 N이 고개에 이르자 J가 가방에서 고구마를 꺼내 들었다. 우리를 포함해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먹기에는 어중간해서 N이 고구마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연필깎이 칼로 토막을 내려다가 그만 힘 대중을 못하는 바람에 그대로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N의 허벅지는 가로로 3센티 가량 찢겨졌고 하얀 뼈가 보일 정도로 깊었다. 이를 본 아이들은 경악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N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길에 버려진 천조각을 주워 상처를 누르더니 절뚝거리며 집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해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대연각호텔화재사건으로 맏형을 잃은 N은 한층 더 어른스럽게 변해 있었다.

중학교 때 육상을 하던 N은 중3 들어 정식으로 복싱을 시작했다. 왜소한 체구에 다부진 몸매, 날카로운 눈빛이 복싱을 하기에는 타고난 체격 조건이었다. 복싱을 하면서 N은 내게 말했다. 반드시 복싱으로 성공할 테니 날더러 자신의 매니저가 돼 달라고. 나는 매니저가 뭐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친구가 원한다면 꼭 해 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N의 복싱 꿈은 고 1때 허리를 크게 다치며 접어야 했다. 허리부상으로 오랫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했던 N은 한동안 슬럼프를 겪고는 이내 활달해졌다. 농고에 다녔던 N은 학교 특성상 서클에 가입하고 있었다. 그의 학교 서클은 당시 시내의 절대강자로, 이름만 들어도 어지간한 아이들은 주눅이 들곤 했다. 그러나 학교 3년 선배였던 그의 형에 이어 서클에 가입한 N은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다. 서클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면서도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그와 함께 길을 걸으면 퇴학을 맞았거나 불량기가 가득한 아이들도 깍듯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비켜줬다. 하지만 N은 이런 대접마저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농고를 졸업한 N은 농사를 지었다. 허름한 작업복에 모자를 쓴 N은 영락없는 농사꾼이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짓더니. N은 안경점에 취직을 했다며 서울로 올라갔다. N이 취직한 안경점은 광화문에 있는 꽤 유명한 안경점이었다.

아마 견습으로 들어갔을 N은 바닥부터 차근차근 시작해 1년이 안돼 왕십리의 조그만 안경점을 맡아 일하게 된다. 눈썰미 좋고 손재주가 있던 N은 특유의 고객관리로 빠른 시간 내에 신뢰를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경점에 야전침대를 들여놓고 숙식을 해결하면서 지독하게 버티길 5년. 마침내 N은 왕십리에 자신의 매장을 열게 된다. 개점에 앞서 N은 나와 또다른 죽마고우인 G와 함께 일주일 동안 설악산과 동해안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1985년 여름이었다.

내가 매장으로 찾아가면 뒷골목 시장통 허름한 대폿집으로 이끈 뒤, “난 아직 맥주는 못 마셔. 그러니 우리 소주 마시자”며 곱창볶음에 소주를 시키던 N. 그러나 나는 안다. 그가 체질적으로 술을 못한다는 것을.

고2 때인가 늦가을이었다. 지금은 동탄신도시로 변해버린 동탄에 갔다가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다 어느 삼거리 슈퍼에서 맥주를 한 병 사가지고 평상에 앉아 잔을 기울이는데 N은 한 모금을 마시더니 이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N은 술자리에 끼는 것을 좋아했다. 물을 마셔가면서도 자리를 지켰다.

N의 성실함으로 안경점은 나날이 번창했다. 서울은 물론이고 의정부, 청주, 대전 등지에 속속 분점도 냈다. 말하자면 ‘안경재벌’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N은 검소했다. 차도 거의 폐차 수준의 중고차를 얻어 타고 다녔다. 도색이 달라 문짝이 짝짝이여도 상관하지 않았다. 이를 본 주위에서 새차로 바꾸라고 성화를 할 정도였다. 이러한 주위의 성화 때문인지 50이 넘어 국내 최고급 기종으로 알려진 신차를 뽑았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이제 돈 좀 쓰고 사나보다고 생각했을 때. 차만 최고급 기종이지 내비게이션은커녕 추가 옵션 하나 없는 차라고 했다.

주위에서는 이러한 N을 인색한 친구라고 수군거린다. 그래도 그는 지하철 출입구 옆에 8층짜리 건물을 가진 빌딩주다. 농사짓던 땅도 제법 알짜배기가 됐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자가 됐지만 N은 여전히 매장을 지킨다. 그런 N을 보면 참으로 한결같이 돌다리를 두드리고 또 두드려가며 세월의 강을 건너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지금의 건물 부지를 살 때도, 또 건축을 할 때도 가까운 동창이 개입했지만 원칙을 고집하던 N이었다. 결과는 처음 건물을 지었던 동창은 물려받은 재산을 지키지 못했고. N은 번듯한 빌딩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N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적어도 그가 우정을 놓고 계산을 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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