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 전시관. 사진=홍길동테마파크 홈페이지 캡처
홍길동 전시관. 사진=홍길동테마파크 홈페이지 캡처

[비즈월드] 황룡강에서 비롯된 황룡면 아곡리에 홍길동 테마파크가 있다. 문헌에 홍길동이 장성현 아곡리 아치실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근거로 한 것이다. 허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은 상당부분 허구이지만. 실제로 홍길동(洪吉同)이라는 도적이 있었음을 ‘조선왕조실록’은 밝혀주고 있다.

연산군 6년(1500) 10월 22일자를 보면, ‘영의정 한치형(韓致亨)·좌의정 성준(成俊)·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 “듣건대, 강도 홍길동(洪吉同)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실존인물인 홍길동은 1443년경 아곡리에서 홍상직(洪尙直)의 얼자(孼子)로 태어났다. 얼자는 양반과 천민인 첩 사이의 소생이다. (소설 홍길동의 동(童)과 실존인물의 동(同)은 다르다.) 하지만 홍상직은 1442년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홍길동은 유복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설 속에 흔히 인용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부르지 못하고’는 실제로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소설 홍길동은 세종 때 서울에 사는 홍 판서의 시비 춘섬의 소생인 얼자다. 길동은 어려서부터 도술을 익히고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기상을 보였으나, 천생(賤生)인 탓으로 호부호형(呼父呼兄)하지 못하는 한을 품는다.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근(禍根)이 될까 두려워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려고 하는데…

홍길동은 차별받던 민중을 규합해 ‘활빈당(活貧黨)’을 결성,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 봉건적 조선왕조의 핍박으로 관군에 체포됐으나 무리를 이끌고 일본 오키나와(流球國)로 탈출, 그곳에서 가정도 꾸리고. 민권운동 지도자로 추대된다. 오키나와에는 민권운동의 선구자 홍길동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장성군은 여러 가지 고증을 근거로 홍길동의 출생지인 황룡면 아곡리에 '홍길동 테마파크'를 조성하고 매년 5월에 홍길동 축제를 열고 있다.

아곡리(阿谷里)는 조선조 청백리의 표상인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 1491~1554)이 태어난 곳이다. 아곡은 중종 때 벼슬길에 나아가 한성판윤을 지낸 청백리. 명종 9년 세상을 떠나면서 봉분도 작게 하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청빈한 삶으로 장례를 치르기조차 어려운 형편임을 알게 된 명종은 나라에서 장례를 치러주도록 했으며 그의 청백리의 행적을 비문으로 남기는 것조차 오히려 누가 된다며 백비(白碑)를 하사했다. 황희, 맹사성과 함께 조선의 청백리로 불리는 박수량의 백비는 황룡면 금호리에 있다.

또 황룡면 아곡리가 낳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구한말 의병장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 1851~1908)이다.

호남 의병가 첫머리에 ‘장하도다 기삼연’이라 했을 만큼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으로서의 활약은 대단했다. 당대 호남 유림을 대표하던 (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하에서 수학한 기삼연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동문수학했던 기우만, 고광순 등과 거사를 결의, 장성에서 의병 300명을 모아 광주로 진격한다. 의병으로서의 시작이었다.

그후 호남의병의 연합체인 창의회맹소의 대장으로 일제의 조선침략에 맞서 싸우다 일본군에 붙잡혀 순국하고 말았다.

거사를 앞둔 어느 날. 기삼연은 붉은 해를 삼키는 꿈을 꾼다. 이 꿈을 붉은 해로 상징되는 일제를 소탕할 소임을 스스로 맡은 것으로 해몽한 그는, 늘 이를 자신했다. 하지만 그 꿈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으니. 그가 남긴 절명시(絶命詩)가 가슴을 친다.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出師未捷身先死)/ 일찍이 해를 삼킨 꿈 또한 허망하도다(呑日曾年夢亦虛)’

황룡강의 기운은 실로 범상치 않은 데가 있다. 그것은 황룡면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된 것으로 뚜렷해진다. 예로부터 장성의 4대 성씨로는 광산김씨, 울산김씨, 행주(幸州)기씨, 황주(黃州)변(邊)씨를 꼽는다. 말하자면 장성의 4대 토반(土班)이다.

황룡리에는 화순 임대정(臨對亭), 담양 명옥헌(鳴玉軒)과 함께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호남의 3대 원림(園林)으로 꼽히는 요월정(邀月亭)이 있다. 하서와 고봉, 그리고 송촌 양응정 등이 이곳을 찾아 소요유(逍遙遊) 했던 요월정 아래 용소는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으로, 큰 인물이 나올 길지로 알려졌다.

이에 원림의 주인인 광산김씨 문숙공파(文肅公派) 문중에서는 ‘큰바위 얼굴’과도 같은 믿음을 가졌고. 마침내 ‘국무총리 김황식(金滉植)’이라는 일국의 재상을 냄으로써 상당부분 실현된 셈이 됐다. 광산김씨로는 그 외에도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4선의 김효석(金孝錫)이 있다.

황주변씨의 인물로는 단연 망암(望庵) 변이중(邊以中l 1546~1611)을 첫 손에 꼽을 수 있다. 장성읍 장안리에서 태어나 157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변이중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소모사(召募使)가 돼 군비(軍備) 수습에 나선다. 그 뒤 조도어사(調度御使)로 누차 전공을 세우는 한편, 화차(火車) 300량을 제조해 권율(權慄)에게 줌으로써 행주대첩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변이중이 쓴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에 의거해 화차를 제조한 공로는 우리나라 병기 제조사에 있어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 받는다. 황주변씨로는 북이면 신평리 출신의 성격파 탤런트 변희봉이 있다.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정읍에서 노령터널을 지나면 장성이다. 전북과 전남의 경계인 노령터널은 말하자면 남도로의 관문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터널을 진입하기 전과 후의 느낌은 확연히 달라진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장성의 존재감은 광주에 가려져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더군다나 호남고속도로가 동서와 남북으로 시원스럽게 뚫려 물류기지로서의 역할까지 해내면서 장성은 잠시 머물다 가는 정거장과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여기에 광주 톨게이트마저 남면 분향리에 있어 노령터널을 지나 백양사 휴게소를 지나면서도 장성임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 여행객들은 이제 장성인가 싶을 때. 또 하나의 새로 뚫린 터널을 지나 광주 톨게이트와 만나며 대개는 언뜻 지나면서 잠시 담아 뒀던 장성시가지의 부분적인 느낌만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장성에 대한 인상은 경계의 모호성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북하면에서 삼서면에 이르기 까지.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기다란 지형을 가진 장성은 남쪽으로 광주 함평, 서쪽으로 영광, 북으로 고창 정읍 순창, 그리고 동으로 담양과 이웃을 하고 있다. 또한 전북과 광주광역시 사이에서 장성(長城) 이라는 이름값이라도 하듯이 남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장성에 머무를 때. 터미널이나 기차역에 내리면 이상하리만치 걸음이 바빠지곤 했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가지를 벗어나 황룡강 물길을 만나 걸을 때야 비로소 마음에 여유가 찾아오는 것이었다. 마치 흐르는 물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와도 같이. 그리고 강줄기를 따라 정처없이 걸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동학농민혁명 때 이곳 황룡강 전투에서 관군에 대승을 거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로 인해 조정은 장성도호부를 군으로 강등시켰다고 한다. 그렇다면 북하면 입암산성 서북쪽에서 발원해 장성호에 모였다가 황룡강 물길을 이뤄 영산상과 합류하는 이 강은 장성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반골(反骨)기질.'

그렇다 황룡강은 묵묵히 장성 땅을 적시며 불의한 것, 더럽고 추한 것을 모두 씻어낼 것을 주문하지는 않았을까.

이러한 장성 사람들의 기질은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를 한 현 군수에게 표를 몰아줌으로써 재신임한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옳고 그른 판단은 우리에게 맡겨라! 아마도 이런 심정이었으리라.

여당인 민주당 지도부가 자존심을 걸고 번갈아가며 장성으로 내려와 지원유세를 하는 등 그야말로 사력을 다했으나, 그 뿐. 요지부동이었다. 우리가 뽑은 군수. 우리가 재신임한다는 장성사람들의 무한한 신뢰감. 그것은 지난 4월 장성역 일원에서 열린 ‘빈센트의 봄’ 축제에서 엄청난 성공으로, 진즉에 ‘옐로우시티’ 장성의 미래를 확신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노란 해바라기를 즐겨 그린 빈센트 반 고흐. 그를 장성에서 만나다니. 마치 프랑스 남부 아를르의 포룸 광장에 서 있는 착각. 기왕이면 황금빛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구스타프 클림트도 초대했더라면 금상첨화였겠는데…

필암서원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

‘옐로우시티’ 장성답게 장성 문향고등학교 인근 도로변 화단에 메리골드가 지천으로 피었다. 꽃말은 ‘다시 오고야 말 행복’. ‘소확행(小確幸)’이 대세인 요즘. 이 또한 얼마나 다행스런 위안이냐. 한참동안 그 꽃을 바라다 보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풀꽃’ 전문)

장성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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