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덕의 南道春風] 17(상)-노란 꽃물결 따라 ‘황룡강 르네상스’를 꿈꾸는 남도의 관문. ‘문불여(文不如)’를 넘어 ‘옐로우시티(Yellow City) 장성으로…
[이해덕의 南道春風] 17(상)-노란 꽃물결 따라 ‘황룡강 르네상스’를 꿈꾸는 남도의 관문. ‘문불여(文不如)’를 넘어 ‘옐로우시티(Yellow City) 장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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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비즈월드] 배추머리를 한 개그맨이 있었다. 얄미울 정도로 입담이 뛰어났던 그는 ‘지구를 떠나거라~’, ‘나가 놀아라~’하면서 웃겼다. 80년대 브라운관을 그야말로 들었다 놨다 했던 그 배추머리 김병조가 바로 장성 사람이다. 호남선 백양사역이 있는 북이면 사거리가 고향인 그는 ‘연안(延安)이씨’와 함께 양반 중의 양반 대접을 받던 ‘광산(光山)김씨’ 종가의 종손이다.

이런 배경으로 그는 비록 웃음을 팔면서도 나름대로 품격을 지켰다. 현란한 언어유희는 언제나 교훈이 담긴 고사성어를 인용해 끝맺기 일쑤였다. 청춘의 시절. 그에게서 은연중에 수없이 들었던 때문일까. 그 때 즈음, 나는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다.

‘문장은 장성만한 곳이 없다.’

수긍이 갔다. 일개 개그맨이 저 정도인데 하물며… 다른 무슨 말이 필요 하겠는가? 이 ‘문불여장성’이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올린(?) 데는 김병조의 공이 컸다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난 2002년 5월. 나는 장성을 찾아갔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인생에 패가 꼬여 스스로 ‘독선기신(獨善其身)’ 하는 마음으로 무모하게도 고시(高試)를 선택했고. 혹시 약발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알량한 생각에서 장성 땅을 밟았던 것이었다.

앞서 집을 떠나 경남 합천 가야산 자락의 한 고시원으로 들어갔던 나는, 순전히 나이 때문에 ‘선생님’ 대접을 받으며 주말이면 원생들을 이끌고 가야산으로, 매화산으로, 또 황매산, 거창 원효봉 창녕 화왕산으로 무른 메주 밟듯이 산행에 나서곤 했다. 고시원은 합천과 성주의 경계 부근이기도 해 저녁을 먹으면 산책 삼아 성주 땅으로 넘어갔다 오는 것도 매일의 일과였다.

그렇게 석 달쯤 지났을까. 어느덧 초심은 흔들리고 타성에 젖어 가는 나를 보게 됐다. 해서 서둘러 수소문해 짐부터 부치고 찾아간 곳이 장성의 고시원이었다. 장성읍 안평리. 폐교가 된 삼성초교를 고시원으로 리모델링한 곳이었는데 운영자인 아주머니는 나를 보더니 ‘배려 차원’에서 교장 사택으로 쓰던 건물로 안내를 한다.

그러나 말이 교장 사택이지. 오랫동안 방치된 탓인지 벽지와 장판은 폐가의 그것과도 같아 거미줄에 벌레가 기어다니고. 욕실의 타일은 겨우 명색만 갖췄을 뿐 하수구에서는 지렁이가 기어나올 정도로 열악했다. 그래도 원장 아주머니의 ‘선생님이시라 특별히 내어 드리는 거’라는 호의인지, 상술인지 좀체 분간이 안가는 말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가 짐을 풀 수밖에 없었다.

잠시 사택의 풍경을 설명하자면 문 앞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수문장처럼 떡하니 버티고 섰고. 사택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허리께로 촘촘히 자란 관상목이 무관심 속에도 제법 사택 가림막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문제는 사택 담 너머 민가였다.

조심스럽게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넘겨다 본 민가는 역시나 폐가였고. 가뜩이나 심란한 나를 더욱 시험에 들게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귀신이 안 나온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환경은 처음부터 나를 주눅들게 했다. 이런 내게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날 밤은 뇌성벽력이 밤새 내려치며 폭우가 쏟아졌다.

“오 마이 갓!”

그런데 분명 공포의 밤이었지만.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은, 그 요란한 천둥소리에도 나는 잠을 잤다는 것이다. 아침에 잠을 깨니.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어 있었고.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가는 한 무리의 소란이 일제히 “형님! 식사 하십쇼”를 외치고 지나간다.

식당에 들어서니 모두들 엉거주춤 인사를 건네며 식탁을 봐준다. 셀프지만 연장자에 대한 나름의 예우였다. 그러더니 식사를 하는 중에 짓궂은 하나가 “형님, 어젯밤에 귀신 못보셨습니까? 여그 고시원에 귀신 나와요” 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좌중은 빙그레 웃을 뿐으로. 아마 자기들 나름대로 신참에 대한 신고식 정도로 생각하고 농담을 건네 보았던 모양이다.

첫 날부터 호된 신고식(?)을 치러서일까. 대낮에도 방안에는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정신은 바짝 드는데 도무지 집중이 되지가 않았다. 최대한 회독수를 늘려 보려 책상에 앉아 책과 씨름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가끔씩은 황룡강 줄기 따라 걸어서 읍내 출입도 하고. 역사(驛舍)도 없이 플랫폼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안평역까지 마을 산책도 했지만 사택으로 돌아오면 일순 긴장감이 감도는 것이 영 개운치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 달 만에 짐을 쌌다. 그리고 다시 나는 가야산을 향해 떠났었다. 그것이 내가 겪은 장성에서의 한 달이었다.

3년 전 영산강 발원지 답사길에 순창 훈몽재(訓蒙齋)를 들렀다 오면서 장성호 끝자락을 적시고. 백양사로 해서 주마간산격으로 장성을 지나간 적이 있다. 그 전에도 곡성에를 갔다가 기차를 타느라고 어찌해서 장성을 찾았었다.

장성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겠지만, 나는 장성을 호남 유불선(儒佛仙)의 본향(本鄕)으로 본다. 그것은 ‘문불여장성’으로 불릴만큼 유학의 고장이요, 고불총림(古佛叢林) 백양사(白羊寺)의 오롯한 선풍(禪風)이 호남은 물론이거니와 한국불교에 끼친 바가 상당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선(仙)은 무엇인가? 도교(道敎)로 불리는 이것은 바로 홍길동(洪吉童)이라는 신출귀몰했던 인물로 설명이 가능하다.

유학과 문장은 ‘광나장창(광주, 나주, 장성, 창평)’이라 했을 만큼 우열을 가리기가 힘든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는 정읍 칠보면의 무성서원과 함께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도 끄떡없던 호남의 대표적인 사액(賜額)서원인 필암서원(筆巖書院)이 장성에 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장성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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