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덕의 南道春風] 16(하)- 치명적인, 그러나 알 수 없는…그들만의 ‘사(死)의 찬미(讚美)’
[이해덕의 南道春風] 16(하)- 치명적인, 그러나 알 수 없는…그들만의 ‘사(死)의 찬미(讚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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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해덕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비즈월드] 김우진과의 만남을 통해 윤심덕은 혼담을 없던 일로 하지만 이번에는 갑부 이용문의 첩이 되었다는 악소문에 시달린다. 당시의 잡지인 ‘신여성’과 ‘개벽’은 호사가들의 구미에 맞는 기사를 여과없이 게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소문은 윤심덕이 동생 성덕의 미국 유학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이용문을 만난 것이 화근이었다.

심신이 지친 윤심덕에게 김우진은 요양할 것을 권유한다. 이에 그녀는 어린 시절 정신적 지주였던 배형식 목사가 있는 하얼빈으로 떠난다. 배 목사 가족과 생활하며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언니인 심성의 남편이 사망했으니 급히 돌아오라는 전보를 받는다.

다시 경성으로 돌아온 윤심덕에게 극단 ‘토월회’에서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연극은 기생들이나 하는 것으로 여겼을 만큼 천대하던 때라 망설였지만 조건이 좋았다. 하지만 주연으로 무대에 오른 연극 ‘동도(東道)’는 참담한 실패를 한다. 대사의 발성 몸짓 모든 것이 서툴렀고 혹평이 잇따랐다.

토월회는 다음 공연으로 윤심덕의 성악의 재능을 살려 오패라 ‘카르멘’을 무대에 올리지만 이역시 실패로 끝나고. 토월회에서 이탈한 단원들은 ;백조회;라는 극단을 만드는데. 윤심덕은 김우진의 권유로 여기에 가입하지만 곧 그만두게 된다.

한편 김우진은 목포 지역 최초로 문인들과 ‘Societe Mai(5월회)’를 결성하며 동인지를 발행하는등 문학에의 시동을 걸고 있었다. 1926년 5월부터는 본격적인 집필활동을 하는데 소설가 이광수의 계몽주의를 비판한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는 평론을 ‘조선지광’에 발표,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이어 현해탄 실종사건이 있기까지 ‘우리 신극운동의 첫 길’, ‘자유극장 이야기’ 등 평론과 수상록 ‘출가’, ‘아 프로테스토’ 등 4편을 더 발표한 것을 비롯해 희곡 ‘난파(難破)’와 ‘산돼지’를 탈고한다.

생전에 김우진은 다방면에 비교적 많은 작품을 남겼다. 시로는 ‘이단의 처녀와 방랑자’를 비롯한 낭만적, 주지적 경향의 작품 48편, 소설은 모두 3편을 남기고 있는데 농업학교 때의 습작인 ‘공상문학’과. 대학시절 일문(日文)으로 쓴‘동굴 위에 선 사람’, 또 ‘옛 조선의 아름다운 이야기’란 부제가 붙은 ‘방련은 어떻게 해서 나병의 남편을 완쾌시켰나’라는 조선 성종 때 장성군의 방련이라는 여인이 나병에 걸린 남편을 살려냈다는 이야기를 소설화 했다. 이밖에 이탈리아 작가 가브리엘 다눈치오의 소설 ‘영웅’의 번역은 미완성 원고로 남아있다. 희곡 5편, 소설 3편, 평론 20편 등을 남겼다.

수상록(에세이)을 보면 김우진의 사상가로서의 기질은 다분히 진보적임을 알 수 있다. 희곡은 ‘두덕이 시인의 환멸’, ‘정오’, ‘이영녀’, ‘난파’, ‘산돼지’ 등 5편을 남겼으며 크게 연극비평과문학비평으로 나뉘는 20편의 평론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위해 목포를 떠나 경성으로 올라온 김우진은 조명희를 만나 같이 여관에 묵으며 러시아로 떠날 뜻을 밝히고 도쿄로 간다.

연극에서의 참담한 실패로 의기소침해 있던 윤심덕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 닛토 레코드사에서 500원에 음반을 취입하자는 제의가 들어온 것. 때마침 동생 성덕의 미국 유학이 결정돼 일본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오사카에 있는 닛토 레코그사에서 동생의 반주로 녹음에 들어간 윤심덕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당초 예정에 없던 곡을 넣자고 간청한다. 자신이 작사한 ‘사의 찬미’였다. 녹음을 마친 윤심덕은 도쿄 홍해성의 하숙에 있던 김우진에게 전보를 친다.

“당장 오지 않으면 자살하겠습니다.”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 사(死)의 찬미(讚美)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그 어디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사의 찬미’는 루마니아의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곡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윤심덕이 노랫말을 붙여 1925년 발표했다. 이 노래는 김우진과 윤심덕의 현해탄의 정사가 특종으로 대서특필되며 당시로서는 엄청난 10만장이 팔려나가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상 최초의 히트곡으로 기록됐다. 당시 레코드판 한 장이 쌀 한가마니 값이었다니. 엄청난 성공인 셈이다. 덩달아서 기와집 한 채 값과 맞먹었다는 축음기도 엄청 팔려나갔다. 이런 까닭에 흥행을 노린 불순한 세력이 이들을 제거했다는 타살설이 나돌기까지 했다.

이들의 실종을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는 정사설과 도피설, 그리고 타살설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그러나 배 위에서 실종됐다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자살하겠다는 윤심덕의 전보를 받고 급히 오사카로 떠나면서 친구인 홍해성에게 ‘자신이 말리지 못하면 도움을 청할 테니 꼭 와달라’고 했다는 증언에서 동반자살의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또한 미국 유학을 떠나는 동생을 요코하마항에서 배웅한 사실이 확인됐고. 따라서 동생의 유학으로 일단 부양의 짐을 벗은 그녀가 평소 그토록 소원했던 이탈리아 유학을 도모했을 가능성이다.

더군다나 당시 1등 객실을 이용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상황(윤심덕은 유류품에 140원이라는 거액을 남겼다)에서 이들이 바다로 뛰어들만큼 절박해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김우진의 목적지는 러시아였다. 그렇다면 김우진이 실종되고 2년 뒤인 1928년 친구 조명희가 러시아로 망명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충북 진천 출신인 조명희는 1928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하바로브스크에서 중학교 교사로 일하며 동포신문인 ‘선봉’과 잡지 ‘노력자의 조국’ 편집을 담당했다. 또 소련작가동맹에 가입, 요직을 맡기도 했으나 1938년 스탈린에 의해 처형됐다.

그러나 선상에서의 실종 그대로 ‘현해탄의 정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쩌면 타당할 것이다. 그만큼 시간은 흘렀고. 그들의 실종을 두고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해진 것도 사실이다.

#후기(後記)

주말인데도 목포문학관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1층에는 여성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소설을 쓴 박화성과 극작가 차범석 관(館)이, 2층에는 김우진과 평론가 김현 관이 있다. 모든 전시는 만족할만한 수준이다. 이들을 혼자서 관람하는 호사(?)를 누리다니. 관람은 여유로웠지만 왠지 씁쓸하다.

사진 속의 김우진은 영락없는 ‘모던 보이’의 모습이다. 목포 문학관 2층에 있는 ‘김우진 관(館)’은 비교적 잘 정돈된 모습이다. 입구에 대형 인물사진과 흉상이 놓여 있고. 유품과 육필원고, 사진들이 전시된 사이로 서재를 재현한 듯한 공간도 눈에 띈다.

목포에서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은 북교동 성당이 유일하다. 내처 성당을 찾아가니 바자회를 준비하는지 차일이 쳐져있고. 몇몇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간다. 화단에 있는 표지석이 김우진이 살았던 성취원 자리임을 알려줄 뿐. 누구 하나 성취원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성당을 나오니 입구 ‘작은 도서관’ 앞에 김우진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보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더 내려가니 김우진의 희곡 ;난파;와 ‘이영녀’ 등을 벽화로 꾸민 골목이. 심지어 아스팔트 위에도 희곡 원고를 그려 놓는 등 온통 김우진을 기념하고 있었다.

작년 봄. 해남 아우 P와 무안의 해변도로를 타고 가다 보니. 길옆으로 ‘김우진의 묘’라는 입간판이 서있었다. 무안 청계면 월선리. 김우진이 실종되자 부친 김성규는 현상금 500원을 걸고 수색 작업을 벌였다. 비록 시신은 찾지 못했지만 그의 부친은 아들의 허묘(虛墓)를 쓰는 것으로 애통함을 달랬으리라.

신파를 벗어난 신극운동으로 연극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 극작가 김우진과 임배세, 한기주와 더불어 우리나라 소프라노 1세대(이들을 놓고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라는 주장이 다르다)인 윤심덕. 그동안 우리는 ‘사의 찬미’를 남기고 애인과 정사를 선택한 팜므파탈과 같은 여인으로, 또 그 치명적인 유혹에 속절없이 무너진 한낱 나약한 지식으로 그들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고. 죽음의 방식마저도 그들의 방식을 따랐으리란 ‘합리적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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