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해덕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비즈월드] <풀리지 않는 현해탄(玄海灘)의 미스테리, 김우진 &윤심덕을 찾아서>

G는 나의 오래된 친구다.

중학교 1학년 때 만난 G는 고향인 용인 보라리가 한국민속촌으로 수용이 되면서 지금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의 후문 쪽인 농서리로 이사를 와 친구가 됐다. 그리 큰 키는 아니지만 다부진 몸매에 강인한 인상을 주는 외모는 마치 로마 전사를 연상케 해,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샌님같은 나와는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인데. 무난하게 얼굴 한 번 붉힌 적 없이 우정을 이어오고 있으니. 나로서는 참 고맙기 그지 없는 친구다.

돌이켜 보면 G는 언제나 내편이 되어 주었다. 막내인 나의 친구들은 우연인지 막내가 많은 편인데. G는 장남이어서인지. 여느 친구들과는 다른, 결단과 아량이 있었다. 나는 그런 G가 좋았다.

곡성을 다녀오고 난 다음 날 저녁. G에게 전화가 왔다. 엔지니어인 G는 평일에는 자신의 천안 사업장을 관리하고 주말에는 양평에 노후를 대비해 마련해 둔 밭에 나가 농부로 변신해 농사를 짓는다. 남들은 퇴직할 나이에 사업가와 농부로,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는’ 중년을 살고 있는 G이지만 잊을만 하면 꼭 전화나 문자로 안부를 묻곤 한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괜찮을까?”

“뭔데?”

“딴 게 아니고. ‘사의 찬미’ 부른 윤심덕이 있잖아. 보니까 그 애인인 김우진이 목포사람이더구만.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그들의 이야기를 좀 써줬으면 좋겠는데.”

“...”

내재된 감성이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대체로 마초같은 분위기의 G에게서 예기치 않게 김우진과 윤심덕의 이름을 들으니. 반가우면서도 과연 친구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까. 적잖은 부담과 긴장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누구 부탁인데 소홀할 순 없잖은가. 그 실마리를 풀기 위해 궁리 끝에 주말 오후 목포문학관을 찾아 나섰다.

# 실종(失踪)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경.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를 떠나 부산으로 가던 부관(釜關)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는 현해탄(玄海灘)의 거센 파도를 가르며 대마도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3000톤급인 육중한 선체의 도쿠주마루는 같은 급의 쇼케이마루(昌慶丸), 쇼토쿠마루(昌德丸)와 함께 이 항로에 취항중이었다. 공교롭게도 배 이름이 모두 조선 궁궐의 이름이란 점이 흥미롭다.

새벽 선내를 순시하던 급사는 1등칸의 3호 객실 문이 열려있는 것을 수상히 여기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러나 객실은 비어 있었고. 짐가방과 함께 지갑과 회중시계가 탁자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습을 이상히 여긴 급사의 눈에 편지봉투 위로 ‘뽀이에게’라고 쓴 쪽지 한 장이 보였다.

‘대단히 미안하오나 부디 이 유언서를 본적지로 부쳐주시오.’

유서였다. 이를 본 급사는 투신을 확신했고. 곧바로 선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갑자기 배에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실종된 승객은 누구인가? 신원을 확인하는 한편 배를 멈추고 동터오르는 바다를 살폈지만 파도만 무심히 일렁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실종자의 신원이 밝혀졌다.

‘김수산(金水山) 남자 30세 조선 목포부 북교동 46번지‘

‘윤수선(尹水仙) 여자 31세 경성 서대문정 1정목 73번지’

그들은 다름 아닌 김우진(金祐鎭,1897~1926)과 윤심덕(尹心悳, 1897~1926)이었다. 호적상 동갑이지만 실제로는 윤심덕이 한 살 연상이었다. 수산(水山)은 김우진의 호였고. 연인인 윤심덕에게 수산의 옆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람인(人)자를 넣은 수선(水仙)이라는 애칭을 지어줬던 것.

김우진 윤심덕의 현해탄 선상 실종사건은 ‘현해탄의 정사(情死)’로 신문마다 대서특필 되며 연일 전국을 들쑤셨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런 선택을 했을까?

# 김우진의 경우

장성군수였던 김성규(金星圭, 1863~1936)와 순천박씨의 장남으로 장성 용강면에서 태어난 김우진은 1907년 부친이 개항장의 실권자 무안감리(務安監理)로 부임하면서 목포로 왔다.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북교초교, 1회)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구마모토(熊本) 농업학교와 와세다(早稻田)대 영문과를 1924년 졸업한 수재. 농업학교 시절 시작(詩作)에 열중했고. 대학생이 돼서는 연극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듯, 니체와 마르크스에 심취했고. 러시아 혁명에 깊은 감명을 받은 김우진에게 현실은 개혁의 대상일 뿐, 안주의 공간은 아니었다.

1920년 조명희, 홍해성, 고한승, 조춘광 등과 연극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를 조직하는 한편 이듬해인 1921년 도쿄 우학생 ‘동우회 순회연극단’의 연극 연출을 맡는 등 두각을 나타낸다. 이러한 신극에 대한 열망으로 김우진은 졸업 후 조명희, 홍해성 등과 귀국하면 극장을 마련해 신극운동을 하기로 약속을 한다. 그러나 계획은 가업계승을 원하는 부친의 엄명으로 무산된다. 더욱이 스무 살 때 결혼한 곡성의 유학자 정운남의 딸(정점효)인 아내마저 김우진의 연극에 대한 열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김우진은 영농사업체인 상성 합명회사 사장으로 취임을 한다.

그에게는 처자식이 있었고. 막대한 부(富)를 갖춰 외견상으로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집은 감옥과도 같았다. 스스로를 ‘In the prison of home’으로 표현할 정도로 우울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가업 계승을 바라는 부친과 김우진의 예술적 열망은 충돌했고. 러시아를 염두에 두고 있던 김우진은 1926년 6월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난다.

# 윤심덕의 경우

평양 출생.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했다. 강원도 원주에서 1년여 동안 소학교 교원을 한 윤심덕은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모집에 1등으로 합격, 한기주 등과 일본 우에노(上野)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한다.

1921년 유학생 동우회인 순회극단에 참여, 주목을 받았고. 1922년 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1년간 조교로 있다 1923년 6월 귀국한다. 윤심덕은 귀국 직후인 6월 26일 동아부인상회 창립 3주년 기념음악회에 초청을 받아 무대에 선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으며 당시 유일한 소프라노 가수인 임배세(林培世)를 제치고 독보적인 소프라노로 각광을 받는다.

이때부터 경성에서 열리는 모든 음악회에는 항상 초청을 받을 만큼 일약 스타가 된 윤심덕.

그러나 치솟는 인기에 비례해 혹독한 비판도 있었다. 가장 비난에 앞장 선 이는 아이러니 하게도 같은 신여성으로 대접받는 나혜석이었다. 동년배인 나혜석의 비평은 혹독했다. 윤심덕의 노래는 소프라노가 아닌 알토에 가깝다는 것으로 그녀의 재질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껍적대는 것 같은 태도를 고치고 수양 좀 하라’고 아예 노골적인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았다.(1924년 ‘개벽’ 7월호)

대중적인 관심은 뜨거웠지만 무엇보다 정통음악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더군다나 평양의 가족들도 이 때 경성으로 이주, 윤심덕에게 생계를 책임지길 원했다. 때문에 모교인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강사와 함께 경성방송국에 출연하기도 했다. 또 극단 토월회와 백조회의 주연배우로 무대에 서기도 했으나 연기력이 없어 실패를 맛본다.

대형 오페라가수를 꿈꾸었던 윤심덕은 생계를 위해 대중가요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꿈꾸던 성악을 조선에 실현하기에는 이 땅이 너무 척박했고. 유교적인 관습 또한 그녀에게는 장벽이얶다.

특히 유부남 김우진과의 사랑은 그녀를 궁지로 몰아갔다. 1926년 미국 유학을 떠나는 여동생 성덕(聖悳)과 함께 일본에 간 윤심덕은 닛토(日東)레코드회사에서 동생의 피아노 반주로 26곡을 취입한 뒤 먼저 일본에 와 있던 김우진을 찾아 나선다. 당초 수록곡에 포함되지 않은 ‘사의 찬미’는 그녀의 간청으로 마지막으로 녹음을 마친 상태였다.

# 김우진 &윤심덕의 경우

김우진과 윤심덕은 1921년 도쿄 유학생 동우회인 순회극단에서 만났다. 어릴적부터 ‘왈녀’라고 불릴 정도로 윤심덕은 활달했고.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란 김우진은 차분했다.

그렇듯 첫 만남에서 둘은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전국을 순회하며 연극을 공연하는 순회연극단은 두 달여의 준비를 마치고 7월 5일 부산에 도착한다. 그리고 부산에서 함흥까지 40일간 25개 지역을 순회한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극단에서 김우진은 연극 연출, 홍해성은 무대감독을, 그리고 윤심덕 독창, 홍난파 바이올린, 한기주 피아노 등 역할을 나누어 맡았다. 그러는 동안 둘은 어느새 서로에게 끌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허약한 양심 때문일까. 도쿄로 돌아온 김우진은 갈등한다. 스무 살에 결혼한 그는 이미 처자식을 둔 유부남이었던 것. 이때의 내적 갈등은 일기로 남아있다.

김우진의 갈등을 눈치 챈 윤심덕은 주저하지 않았다. 곧바로 김우진의 하숙으로 찾아나선 것. 구애(求愛)였다. 서로를 확인하고 난 후에는 아무 거칠 것이 없었다. 문학과 음악을 매개로 한 둘의 만남은 한없이 진지했고 설레는 것이었다. 도쿄의 시간은 그렇게 흘렀고. 2년 뒤인 1923년 윤심덕이 먼저 도쿄를 떠나면서 둘은 잠시 이별을 해야 했다.

다음 해 목포로 돌아온 김우진은 상성합명회사 사장으로 취임을 한다. 그리고는 윤심덕에게 동생들과 목포로 와 가족음악회를 열어줄 것을 부탁하고 기차표를 보낸다. 윤심덕의 바로 밑 여동생인 성덕은 이화여전에서 피아노를, 남동생 기성은 연희전문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있었다.

기꺼이 초대에 응한 윤심덕은 목포로 내려와 김우진의 부모와 처, 동생 등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음악회를 열었다. 가족들로 인해 둘은 의례적인 만남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더욱 가까워졌다.

하지만 둘의 관계를 눈치 챈 윤심덕 집안의 반대는 완강했다. 이중에서도 우군일 것 같았던 성덕의 반대가 대단했다. 부모는 이미 혼기를 놓친 윤심덕의 혼사를 서둘렀다.

성악의 본고장인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대형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었던 윤심덕은 현실의 벽앞에 흔들렸다.

혼담이 오갔고. 부모가 고른 상대는 재력있고 집안 좋은 함경도 청년 김홍기였다. 대중 스타였던 윤심덕의 결혼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소식을 들은 김우진은 윤심덕을 만나러 경성으로 올라갔다.

“결혼한다니 무슨 말이요?”

“부모님이 하도 채근하셔서...”

“그럼 나만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이었소?”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저로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더군다나 당신은 목포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질 못하시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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