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개최된 제 곡성 심청축제 모습. 사진=곡성군청 홈페이지 캡처
2017년 9월 개최된 제 16회 곡성심청축제 행사 장면. 사진=곡성군청 홈페이지 캡처

[비즈월드] 곡성군이 심청축제를 열게 된 배경은 이렇다.

심청전의 핵심인 효녀 또는 개안(開眼)설화는 여러 유사 형태가 전한다. 그러나 곡성군의 ‘옥과현 성덕산 관음사 사적’에 나타난 연기(緣起)설화만큼 효행, 인신공양, 개안이라는 구조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등장인물의 설정은 그 어느 설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럼 관음사 연기설화는 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심청전의 원전(原典)으로 꼽히는 걸까.

충청도 대흥현에 맹인 원량은 처를 잃고 홍장이라는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홍장은 정성으로 아버지를 모시니 그 효행이 바다건너 중국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다. 어느 날 홍법사 성공스님이 부처님의 계시라면서 시주를 간청하고, 논밭 한 뙈기 없었던 원량은 홍장을 딸려 보내니.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홍장의 이별은 고을사람들은 물론 산천초목까지도 슬프게 했다.

성공스님을 따라 나선 홍장이 소랑포에서 쉬고 있을 때. 진나라 황제가 황후간택을 위해 파견한 사신 일행을 만나게 된다. 사신들은 홍장의 용모를 살피고는 진나라 황후가 되어달라고 간청한다. 이에 홍장은 예물로 가져온 금은보화를 모두 스님께 드리게 하고, 사신들을 따라 진나라로 건너가 황제인 혜제의 황후가 된다.

황후가 된 홍장은 고국에 두고 온 부친을 잊지 못해 관음상을 만들어 바다건너 동국으로 보냈다. 석선(石船)에 실린 관음상은 표류 끝에 낙안포에 나온 성덕처녀의 수중에 들어갔고. 성덕처녀는 그 관음상을 업고 고향인 옥과로 와서 지금의 관음사를 창건한다.

효녀 홍장이야기는 곡성 관음사의 관음신앙과 맞물려 주로 호남지역에서 전승되다가 1729년에 문자로 정리돼 목판본인 ‘옥과현 성덕산 관음사 사적’으로 대량 발행, 유포되면서 널리 알려진다. 이런 과정을 거쳐 황후가 된 효녀 홍장과 그 부친 원량의 눈뜬 이야기(원홍장전)가 고대소설 심청전과 판소리 심청가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홍장의 이야기가 심청전으로 전개된 것은 이웃 남원의 춘향과 성이성의 이야기가 성춘향을 내세운 춘향전으로 발전힌 것과 일맥상통한다.

원홍장전의 배경인 충청도 대흥현은 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이다. 이곳은 ‘의좋은 형제’의 설화가 깃든 고장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 예당지가 있는 이곳에 가면 대흥초등학교 앞에 ‘의좋은 형제’ 조형물을 볼 수가 있다.
대략 짐작은 하겠지만 원홍장전의 무대는 광범위하다. 대흥현~소랑포~중국 진나라~낙안포~옥과현 성덕산 관음사에 이르기 까지. 실로 버라이어티한 전개가 아닐 수 없다.

이곳 관음사를 비롯해 태안사, 도림사 등 곡성에는 유서 깊은 천년 사찰이 여럿 있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는 절집은 옥과면에 있는 성륜사다. 성륜사는 청화(淸華) 큰스님(1923~2003)이 1990년에 창건한 절이다. 옥과리 설령산자락 남종화의 마지막 대가로 불렸던 아산(雅山) 조방원(趙邦元, 1926~2014)이 내놓은 땅 10만평에 대상그룹의 시주로 지어졌다.

염불선(念佛禪)을 주창한 청빈한 수행자의 표상인 청화 스님은 하루 오전 한 끼만 먹는 일중식(日中食)과 자리에 눕지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라는 용맹정진을 무려 40년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안이 고향인 스님은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동서양의 철학을 공부하던 중 1947년 백양사 운문암에서 만암 스님의 상좌인 금타 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한다. 그리고 청화스님은 1952년 고향인 무안 운남면에 망운중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무안 혜운사(1953), 장흥 능엄사(1970), 곡성 성륜사 등 많은 사찰을 창건한다.

이처럼 남도 곳곳에 절집을 지은 청화스님을 보면 우리 땅에 엔간한 사찰을 창건한 고승인 원효와 의상, 자장, 도선 등에 비견되는 생불(生佛)이었음을 미뤄 짐작할 수가 있다. 이러한 엄청난 불사가 가능했던 것은 범인(凡人)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용맹정진의 정수가 아니겠는가.

조지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는 시그나기로 순회공연을 온 마가렛에 반해 전재산을 팔아 그녀의 숙소 앞을 백만 송이 장미로 채웠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시그나기는 유럽의 연인들에게는 순례지와도 같은 ‘사랑의 도시’가 됐다. 이곳에 가면 언제라도 결혼식을 올릴 수가 있다. 곡성군도 장미축제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시그나기와 같이 한국판 ‘사랑의 도시’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기차마을 입구인 구 곡성역 주변으로는 ‘향수마케팅’의 일환인지 6,70년대 거리를 복원해 놓았다. 너무 작위적인 모습이 조금은 거슬렸으나 아날로그에 대한 작은 위안은 될 수도 있겠다.

사진=이해덕 제공
사진=이해덕 명예기자 제공

돌아오는 길.

곡성터미널 매표소에서 표를 사려니 창구는 막혀 있고. 옆에 있는 자동발권기를 이용하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할 수 없이 발권기를 이용하려는데 한 아주머니가 난감한 듯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다. 구례로 간다는 아주머니는 내가 발권하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표가 나오자 이내 안도하는 눈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다수가 노인들일 터인데 이 모양이다. 나 역시도 자동발권기를 이용하기는 처음이라 적잖이 당혹스러웠는데 어쩌자는 것인지.

7년만에 다시 찾은 곡성은 이처럼 터미널의 기억부터 낯설다. 7년전 이맘 때. 당시 논설위원으로 있던 신문사의 K부장과 어쩌다 전라선을 타게 됐고. 곡성역에 내렸으며. 역 앞 장터에서 피순대국밥과 막걸리를 마셨고. 터미널까지 걸어와 광주로, 다시 장성으로 가서 호남선 기차를 탔던 것이다.

물론 곡성은 남원에서 구례가는 길에, 또는 순천 여수로 가는 길에 여러 번 지난 적은 있다.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 절경을 이루는 압록은 얼마나 뭉클한 풍경인가. 기차마을이 유명세를 타기 전에 곡성하면 열에 여덟은 이곳을 꼽을 정도였다. 그만큼 좋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여름철에 모기도 없단다. 여기엔 강감찬 장군과 어머니의 설화가 등장한다. 노모를 모시고 유람하던 장군이 이곳에 이르렀을 때. 모기가 극성을 부려 노모가 잠을 못이루자 고함을 질러 모기의 입을 봉하였다는 이야기다.

서울사람인 강감찬 장군이 노모와 이곳을 찾았다? 여하튼 곡성 사람들의 상상력은 탁월한 데가 있다. 이러한 유전자가 기차마을을 탄생시킨 배경은 아닐까.

장미만 보자고 찾아온 길. 압록은 그만 다음을 기약하며 곡성과 작별을 한다. 4시 20분 광주행 버스는 정확히 5분 일찍 터미널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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